11월 20일 오후 4시 47분의 기록
이 노트를 산 게 딱 1년 전 서촌에서였는데, 다시 서울에 와 이 딸기향 가득한 노트에 글을 쓰고 있다. 을지로 ‘라이팅룸’의 책상 앞에서. 라이팅룸은 나만의 ‘기록’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색하고 기록하며 나를 마주하고, 가장 나다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북돋아 준다. 7살 때 유치원에서 처음 만난 친구와 함께 온 서울 여행에서, 라이팅룸 방문은 우리의 1순위 일정이었다.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지만 뒤의 일정이 바빠 네 시부터 다섯 시까지, 한 시간을 예약했다. 공간에 들어서자 오후의 찬란한 오렌지빛 햇살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예약한 한 시간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 지나버렸다. 공간의 이곳저곳을 눈에 담고, 다른 손님들이 써놓은 노트 속 글들을 읽어 보고, 본격적으로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자리에 앉자 이미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30분이 채 남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25분. 이 작고 소중한 25분을 후회 없이, 온전히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가져온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쳐 한 줄, 두 줄 읽어 내려가다 어느새 마음을 빼앗겼다.
정신 차려 보니 내게 남은 시간은 10여 분 정도였다. 후다닥 책을 덮고 노트를 꺼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창밖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또 노트 속 익숙한 글씨체의 흔적들을 내려다 보길 몇 차례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약속한 시간이 끝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끝이 예정된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간다(수업 시간, 근무 시간 빼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짐을 챙긴 후 다음을 기약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간 혼자 카페에 들러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다. 혼자만의 시간은 달콤하면서도 때론 외로웠다. 사람이 고프면서도 누군가를 만날 에너지는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곳에서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은 외롭지 않았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이들이 내 옆에서 읽고, 쓰고, 사색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텅 비어 있던 무언가가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이 공간을, 읽고 쓰는 행위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서로의 마음 한 구석을 살며시 나누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공간에 방문한 이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노트를 보는 시간이 정말로 행복했다. 누군지 모를 이의 고민에 따뜻한 답글의 답글의 답글까지 달린 것을 보고, ‘마음’이란 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참 강력하구나 느꼈다. 따로, 또 함께하는 듯한 낯선 기분에 어느덧 내 마음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참 신비롭고도 특별한 공간이다. 그 누구와의 교류도 없는 혼자만의 한 시간이 이토록 충만하게 느껴지다니.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친구에게 “안녕,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하며 안부 인사를 건네듯, 스스로에게 안부를 물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마음은 요즘 안녕한지, 괜찮은지.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자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바깥세상의 화려함을 여행하느라, 은은하고 잔잔한 내 마음의 빛에 애정을 기울이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