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안도감
연말에는 언제나 내년의 목표를 세우고는 했었다. 내년에는 어떤 점을 더 개선해야겠다거나 어떤 점에서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는 했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다음 해가 기대되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마흔 살이 되고 나서는 연말이 되어도 이전처럼 들뜨지 않게 되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에 집중해 왔던 것과는 달리 올해는 더 이상 내년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30대 내내 연말을 맞이할 때마다 새해 목표가 없었던 적은 없어서, 내년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내년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다는 것은 올해 내가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데, 나는 올 한 해 이룬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번 해도 애를 쓰긴 했었다. 연초에는 대학원 졸업을 했고, 그 뒤에는 바로 전문직 자격증 시험에 도전했었다. 1차는 객관식이고, 몇 개월만 해도 붙는다는 말에 직장을 다니면서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가 떨어졌고, 한동안 무기력했었다. 공부를 하면서 시험이 끝나면, 글을 꼭 쓰리라고 마음먹었었다. 시험이 끝나면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구상했던 소설은 아직도 쓰지 못했다. 대신 브런치에 매주 한편씩 글을 썼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공모전에서 입상하고 싶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고, 글을 써서 돈을 벌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은 한 편 한 편 글을 쓰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쓰고있다. 글을 쓰면서 내 글에 대한 피드백이나 반응을 받는 것도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내 글이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할까봐 두렵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가끔은 진공의 끝없는 우주공간에 글을 한편씩 쏘아 올리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올해는 외형적으로 멈춰있었던 한 해 같다. 30대 내내 나는 계속 무리해 왔고 애써왔었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해 왔다. 30대에는 무언가를 계속 이뤄왔지만, 애초에 그 목표들이 내가 진심으로 원하던 목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한다니까 나도 한 것이었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따라왔다. 그것들이 내가 진심으로 원하던 선택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려 나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내렸던 결정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덕을 본 것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뭔가 더 해야 할 것 같고, 여전히 부족한 사람인 것만 같다.
목표를 세우는 순간과 목표를 이루는 순간은 정말 찰나와 같은 순간인데, 시작에서부터 달성까지 그 과정은 너무 길기 때문에 세상 일의 대부분은 그 중간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과정은 지루하고 반복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인데 오늘 글을 쓰기 위해 조금 더 애쓰는 것이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분명히 이다음에 뭐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계속한다. 매번 쓰는 글 한편 한편이 내 글쓰기 여정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고, 내 글쓰기 실력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글을 쓸 때 행복하지만, 한편으로는 막연한 순간도 있다.
브런치북 '다정한 실패'에 글 하나를 더 연재하려는 순간 '더 이상 새로운 글을 연재할 수 없는 브런치북입니다. 연재할 수 있는 최대 분량을 모두 채웠습니다. 다른 브런치북을 선택해 주세요.'라는 팝업이 발생했다. 브런치북은 최대 30개까지의 글만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부랴부랴 새로운 브런치북을 만들어서 다정한 실패의 글을 올렸다. 아직 내 안에 남아있는 글로 옮기지 못한 실패가 아직도 너무 많은데, 브런치북 하나에 글을 30개밖에 올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글 개수에 제한이 없다면 나는 아마 100편이 넘을 때 까지도 계속 써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 쓸 내용이 많이 남아있어서 다정한 실패 2라고 이름을 붙이고 계속 글을 올리기로 마음먹는다.
첫번째 브런치북에 올릴 수 있는 글의 개수를 모두 채웠는데, 내 글쓰기 여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만 같다. 나는 요즘도 브런치에 글 연재를 시작할 때와 똑같이 이번 주는 뭘 써야 하나 고민하고 내 안에서 글감을 굴리다가 글로 써서 한편씩 올린다. 내가 지금 혼자 보는 일기장에나 써야 할 말을 브런치에 공개적으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이런 글이 어딘가에 닿을 수 있을까 하면서 글을 쓴다. '다정한 실패 2'도 30개의 분량을 다 채우고 난 후에는 과연 무엇이 변해있을지 궁금해진다. 아니, 두려워진다. 지금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봐 두렵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지금처럼 언젠가는 뭔가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글을 써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진다.
회사일에 대해서는 온전히 나의 것이라는 감각이 없고, 조건만 맞으면 퇴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은 담당하고 있는 업무에 애정과 책임감을 갖고 일하고 있지만, 내가 이 업무를 담당하지 않게 되더라도 누군가 바로 이어서 할 것이다. 작년 연말에는 올 한 해 대출을 많이 갚자고 다짐했었는데, 올 한 해 대출을 거의 갚지 못했다.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깊은 인간관계들을 정리했었고, 가치관이 많이 바뀐 한 해였는데, 이런 것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아서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이 조금은 무겁다. 지쳐서 주말 내내 집에만 있던 아쉬운 주말들이 떠오르고, 할까 말까 하다가 나중에 하려고 했지만 결국 못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면 하나는 분명하게 남아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글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말하기 어려운 해였고, 내년의 목표도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지만, 올 한 해 꾸준히 글을 썼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누구나 대신할 수 있는 회사일과는 달리, 이런 실패와 불안함, 두려움을 꾹꾹 눌러 담은 내 글은 내가 아니면 쓸 수 없다. 너무 사적인 글이라 내가 썼다고 드러내기조차 조심스러운 글들이지만, 그래도 이 글들은 그동안 고민하고 나아가고자 했었다는 뚜렷한 증거물 들이기에 이 기록들은 소중하다. 써낸 글 한 편 한 편 부끄럽지 않은 부분이 없다. 글을 쓰고 나면, 부족한 점만 보인다. 하지만 30개나 쌓인 브런치북의 글 목록은 내가 잘 살아내기 위해 애썼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 목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가 않아서 올 한 해 비록 이룬 것은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글은 남겼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