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의 공동육아 실현가능성]

성선설, 신뢰, 다양성, 기회, 자기 효능감

by 운옥

오늘 우연히 내 유튜브 영상 목록에 CBS 70주년 창사특집 영상이 떴다.

평소 관련된 채널이나 영상을 본 기억이 거의 없어 어떤 알고리즘을 타고 나에게 영상이 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빠가 20명” 낯선 사람들과 함께 아들을 키운 엄마의 육아노트’라는 제목을 보고는 호기심에 클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아빠가 20명’이라는 문구는 조금 자극적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영상을 보면 성별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미혼모가 아들을 양육하는데 함께 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상의 내용은 마치 유쾌하지만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을 컨셉으로 한 생활 만화나 다양한 인간군상의 젊은 청춘들이 잔뜩 등장하는 청춘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이제 20살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미혼모 여성은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들의 육아였다.

이에 대해 그녀의 친구는 육아를 함께 할 사람을 모집해서 공동육아를 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공동육아자 모집 전단지를 만들어 엄청난 실행력을 발휘한다.

이후 사회에서 쓸모없는 몹쓸 인간이라고 취급받던 일명 젊은 ‘다메닝겐(ダメ人間)’들이 참여하여 수년에 걸쳐 아이를 키우는데 함께 한다.


영상 속 인터뷰를 보면 공동육아는 참여자에게도 아이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공동육아에 참여했던 사람은 당시 23세로 취직도, 연애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무기력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참여했다고 그 참여 동기를 인터뷰에서 밝혔다.

공동육아 대상자였던 아이는 1994년생으로 1살 때부터 10대 초반까지 공동육아되었고, 주변 친구들과 다른 경험을 했다는 것이 자신을 주눅 들게 하는 요소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상황에 따라 다양한 공동육아자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에피소드 중에는 우리가 엄마한테 혼나면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 품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매달리던 에피소드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당시 이뤄진 공동육아는 엄마에게는 육아문제 해결책이 되었고, 참여자에게는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기회가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아이에게는 다양한 인간들을 만나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상황에 대한 포용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되었다.


영상을 보면서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옛날에는 가족도 대가족 형태가 많았고, 동네 사람들과도 워낙 친하게 지내서 누구네 집 엄마가 바쁘면 대신 아이를 맡아 주기도 했다.

또 아이들이 동네에서 놀고 있으면 동네 어른들이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은연중에 챙겨주기도 했다.

당시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육아’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으로는 공동육아가 이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핵가족화가 되고 이웃들과의 교류도 감소하면서 어느 순간 암묵적인 공동육아는 중단되었고, 육아는 엄마 또는 아빠의 ‘독박육아’로 변질되었다.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없고, 육아로 인해 육아 담당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의 호소가 많아진 지금과 같은 육아문제는 사실 독박육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서 심각해졌다.

아니 이제는 경제 활동을 위해 독박육아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추가적인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사회적 환경에서 육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암묵적 공동육아가 진행됐던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부분에 집중해야 할까?

아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포인트는 육아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에 달렸을지도 모른다.

'혼자가 아닌 다수'


다만, 그 다수를 어떻게 꾸릴 것인가가 문제이다.

영상 속 미혼모와 같이 전단지를 보고 온 사람들을 믿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의 너무나 소중한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돌볼 수 있을까?


다수를 구성하는 것을 위해서는 더 거슬러 올라가 해결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보느냐와 사람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 이다.

사람을 선한 존재로 보고, 상호 관계가 없는 타인이라도 나와 나의 소중한 존재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사람의 본성 문제와는 별개로 사람의 신뢰 문제의 경우 과거에는 혈연이나 사람들 간의 친밀한 관계 정도가 타인이 나나 내 아이를 해칠 수 있다는 불안을 상쇄시키는 안정장치로 작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의 조건들이 다양해져 과거의 안정장치들을 사용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는 이 신뢰 문제는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공동육아는 유토피아적인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가끔 사람이 사람을 돕는 미담에 열광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혈연이나 관계로 묶여있지도 않고, 돈으로 묶여있는 육아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도 아니라고 할 경우에도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 중 나의 아이를 이쁘다고 쓰다듬어 주는 사람을 어느 정도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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