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통찰 인문학 #. 7
틀린 질문만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올 리가 없잖아
이 대사를 들었을 때, 묵직한 무엇 하나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것은 오대수의 장도리도 아니고, 토르의 묠니르도 아니었다. 그 둘 보다 충격이 컸던 통찰이라는 망치. 인문학의 근원은 '왜'라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이 대사는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경종을 울린다.
이러한 차원에서 영화 '올드보이'는 인문학 그 자체다.
자꾸 질문을 던진다. 대사 하나하나가 그렇다. 그 질문에 인생을 반추하느라 오히려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을 정도다. 심오한 질문이 그대로 지나가는 걸 견디기란 쉽지 않다. 질문을 곱씹지 못하거나, 아직 대답할 준비가 안되었는데 지나가는 대사는 가혹함이다. 그러니 영화를 여러 번 볼 수밖에 없다. 어떤 때는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쏟아져 나오는 질문을 받아 적기로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영화의 전반은 밝지 않다.
어쩌면 그것이 틀린 질문만 해대면서 삶을 (스스로) 힘겹게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밝음 정도가 아닐까.
내가 삶에게, 삶이 나에게 던지는
'왜'라는 질문
왜 당신을 가뒀을까.. 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야. 왜.
왜 나는 당신을 15년 만에 풀어줬을까?
영화 처음부터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틀린 질문 속에 갇힌다.
왜, 그리고 누가. 무엇 때문에 주인공을 15년 동안 가두었을까. 주인공에 이입된 감정은 예외 없이 단 하나의 질문으로 쏠린다.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어리둥절함은 그 질문 하나에만 의미를 두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나를 태어나게 했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의중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누군가에 의해 갇히거나 풀려나는 그 상황. 대체 누가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살아가게 만들며, 웃고 울게 만드는가. 더 나아가 기어이 주어지는 죽음이란 운명 앞에서, 올드보이 주인공의 억울함보다 우리의 그것이 더 커 보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어떠해야 하는가.
무엇이 맞는 질문일까.
우리를 이 세상에 가두어 놓은 절대자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을까?
왜 당신을 태어나게 해, 이 세상에 가뒀을까... 가 아니라.
왜 당신은 살아가야만 하는 가야, 왜.
왜 나는 너를 살게 해 줬을까?
질문은 나만이 던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세상이 나에게 던지기도 한다.
물론, 그 질문은 불공평하다. 나는 답을 모르고 질문을 던지지만, 세상은 그리고 절대자는 답을 알고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도, 불리한 것도 '나'이므로 삶은 고달픈 것이다.
대사라는 질문, 질문 속에 담긴 힌트
결론적으로 인생을 규명할 딱 맞는 질문도, 그에 맞는 정답도 딱히 있진 않다.
그렇다면 범위를 다시 좁혀 영화 속으로 가본다. 대사 하나하나엔 깊은 의미가 있고, 그곳에서 통찰을 이끌어 내어 삶의 힌트로 삼으면 된다.
"아저씨,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두요.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과연 그렇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살 권리는 무조건 있는 것이다. 짐승만도 못한 놈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건 우리와 시대의 가치일 뿐. 짐승만도 못하다는 기준과, 그 사람을 죽여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명확한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났으면 우선 살고 보는 게 가련한 사람의 운명이다.
"웃어라, 모든 사람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의 '고독'이란 시를 차용했다. 무표정한 주인공이 이 대사를 읊을 때, 나는 그와 함께 고독을 느꼈다. 심지어는 이 대사가 '고독'이란 시인지도 몰랐을 때였다. 그와 같은 즉각적인 동감은 삶의 경험으로부터였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삶을 되돌아볼 때, 내가 즐거우면 세상이 즐거워 보였고 슬프면 혼자 슬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것은 기억으로만 끝나지 않고, 실제로 일어나는 실체이자 현실이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이 대사는 맛이 쓰다. 쓴 약이 몸에 좋은 법이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살아간다는 건, 우리가 살아낸다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에게 기대를 가지는 게 얼마나 허망한가를 길지 않은 삶을 통해 깨달았다.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은 그래서 절절하고, 그래서 생생하다.
"그때 그들이 '십오 년'이라고 말해 줬다면 조금이라도 견디기가 쉬워졌을까... 아니었을까."
신이 나의 운명을 다 읊어준다면.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알게 된다면. 과연 그 삶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해보는 이 상상을, 단 한 줄의 대사로 명쾌하게 표현했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묻는다. 내 미래는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냐고.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 봐. 존나 용감해질 수 있어."
모든 불안은 상상 속에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생각보다 크게 휘둘리는 이유다. 좀 더 용감해지고 싶다면, 덜 상상하고 더 움직이는 게 낫다는 결론이다.
"별로 안녕하지 못하다. 더 넓은 감옥에서의 삶은."
삶은 찬란하다가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허무해질 때가 있다.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나, 대기권이란 어항에 갇힌 사람이나. 무엇이 그리 다르다고 우리는 기고만장할까. 존재하는 금붕어나 존재하는 우리의 삶의 허망함은, 어쩌면 우리의 그것이 더 클지 모른다. 허망함의 크기를 본다면 금붕어의 삶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쉴 새 없이 던지는 질문.
당최 답이란 없을 질문. 그럼에도 계속해서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우리네 삶.
그러게, 우리는 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질문은 포기한 지 오래고, 그것에 대한 답은 절대자를 만날 때까지 유보해야 할 운명이란 걸 알기에.
그보다는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게 조금은 덜 틀린 질문이란 생각이다.
즉, '사람은 무엇인가'를 넘어, '사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어쩌면 이것이 나를 좀 더 의연하게 살게 할 지금 당장 필요한 질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