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훌륭한 마조히스트가 되고 싶다.
삶은 고통과 쾌락이 뒤엉키는 마조히즘적 여정이다.
마라톤 선수는 결승선을 통과하는 통쾌함을 느끼기 위해 그들의 몸 곳곳에 고통을 스며들게 한다. 암벽을 등반하는 사람은 가파르고 위험한 절벽에 오르고, 장애물이라는 도전을 흔쾌히 맞닥뜨린다.
왜일까?
우리는 종종 완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심리적 불편함에 우리 자신을 종속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능동적인 존재다. 그 능동성이 지나쳤기에 그래서 어쩌면 만물의 영장으로 발돋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이 깊으면 골이 깊은 법. 능동성의 기저에는 수동성이 자리 잡고 있다. 때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선택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그 압박감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삶은 수많은 선택과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가.
프로이트는 그의 논문에서 마조히즘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성애발생적 마조히즘.
둘째, 무기력함의 마조히즘.
셋째, 도덕적 마조히즘.
이 셋의 공통점은 반대급부에서 발생하는 것을 바탕으로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첫째는 고통으로부터, 둘째는 무기력으로부터, 셋째는 도덕에 기초한 자신의 신념으로부터. 불편한 마음을 회피하기 위한, 좀 더 나은 마음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이러한 노력은 육체적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하므로 마조히즘은 고통으로부터 느끼는 역설적 쾌락이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느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삶은 참으로 마조히즘적인 무엇이다.
고통이 더해질수록 쾌락이 커진다는 마조히즘의 원초적 작동원리를 보면 그러하지 않은가. 삶이 주는 고통은 상당히 크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언젠간 죽어야 하는 이 상황극은 비극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연과 싸워 문명을 이룩한 인간은, 이제 어느덧 인간과 인간이 대립하여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고 있다. 주머니 속 이어폰이 스스로 꼬이는 것처럼, 그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은 우리를 조련하는 삶의 가장 큰 무기다. 내 이상과 삶의 현실은 부조리를 만들어내고, 그 부조리에 휘둘려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을 방황한다.
그러나 나는 느꼈다.
방황의 시간. 되는 것 하나 없는 삶. 무엇 하나 준비되지 않은 나를 모질게도 밀어붙이는 숨 막히는 순간에, 오히려 나는 내가 숨 쉬고 있음을 말이다. 숨 쉴 땐 몰랐는데, 숨이 막혀오니 나는 숨 쉬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마음의 불편함 속에서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굳이 이러한 역설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이것 또한 삶의 농간인 듯처럼 보이나 그러함에도 끝내 막히지 않은 숨은 오늘도 나를 숨 쉬게 하고 있다.
고통 속에 쾌락이 있고.
쾌락 속에 고통이 있다.
이런 허무맹랑한 법칙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무책임하면서도 기괴한 생각 속에 '삶'이라는 게 존재하고 있으며, 그 존재 안에 우리는 또한 존재하고 있으니 삶에 대적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부조리를 인정하고, 나와 삶의 간극이라는 외줄을 타며 그 모든 순간을 즐기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걸 나는 안다. 따귀를 맞았을 때의 얼얼함은 손바닥과 뺨이 마찰을 이루어낸 이후의 느낌이다. 마찰의 순간을 우리는 두려워 하지만, 이후의 얼얼함은 두려움보다는 크지 않은 무엇이며 얼얼함은 순식간에 피부의 열을 올려 식혀나가는 자기 치유의 과정이라고 보면 우리는 썩은 미소라도 지을 수 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키울 뿐이다.
고통의 정점은 두려움의 순간을 조성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치유와 성장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영원히 흘러내릴 돌을 올려 내는 시시포스의 엉덩이 춤을 나는 상상한다.
이렇게도 올려 보고, 저렇게도 올려보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신명 나게 올려내는 돌은 이전보단 가볍지 아니할까. 그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는 모습은 진정한 마조히스트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삶에 있어 나는 훌륭한 마조히스트가 되고 싶다.
고통 그 자체를 쾌락으로 만들 수 있다면.
삶도 그리 힘들지만은 않은 새로운 여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