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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20. 2024

곱게 죽을 수 있을까

<스테르담 중년과 에세이>

어머니께서 사진 한 장을 보내셨다.

"XXX 사진이다. 엄마 마음이 아파. 가서 씻기고 뭐라도 좀 먹이려고. 엄만 곱게 죽어야 하는데..."


앙상한 뼈만 남은 사진 속 사람의 모습에서, 나는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그 누구보다 호기로웠던, 그래서 어쩌면 집안 내 트러블 메이커를 자처했던 그. 기억 속 모습과 사진 속 모습의 괴리만큼이나 마음은 어수선했다.


그보다 더 내 머리와 마음을 교란했던 건, 바로 어머니의 '곱게 죽어야 하는데...'란 말이었다.

곱게 죽는다라...과연, 사람은 곱게 죽을 수 있을까?


'죽는다'와 '곱다'란 말이 당최 어울리기는 한 말일까?

죽는다는 건 인간의 최종적인 두려움을 말하고, 사고나 병 또는 노환으로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존재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초라하기만 하면 다행일까, 그 모습은 어쩌면 처절하기까지 한데 그 처절함 안에서 과연 '곱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까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곱게 죽는다'란 말은 왜 생긴 걸까.

생각해 보니 죽음과 관련된 말 중에 긍정을 담은 말이 있긴 하다. '호상(好喪)', 복을 누리며 별다른 병치레 없이 오래 산 사람의 상사를 말한다. 어라, 나 또한 죽음의 때에 이르러... 그냥 자다가 고통 없이 영면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은연중 해왔던 것 같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고통, 또 하나는 죽음 이후의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숨이 멎게 하는 고통은 상상 이상일 것이고, 죽음 이후 우리네 존재는 어찌 될지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으니 막막할 수밖에.


그래서 나는, 과연 곱게 죽을 수 있을까.

고통 없이, 누구에게 폐 끼칠 일 없이, 사후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문득, 곱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곱게 살면, 곱게 죽을 수 있지 않을까. 곱게 죽으려면 곱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 어떤... 막연한 희망. 기대. 또는 착각?


전쟁터와 같은 사회생활을 하며, 곱게 살지 못했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곱게 살아야지 다짐하면서도, 또 아웅다웅하다 보면 고운 삶과는 거리가 멀어지겠지만. 100번 중 한 번은, 그래도 한 번은 고와보자고 다짐하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나에게 곱지 않았던 사람들의 호상을 기원할 수 있을 정도로.)


죽음을 논하기엔 현실적인 숙제들이 너무나 많다.

곱게 죽는 것에 대한 고민보단, 곱게 살아보자는 다짐이 더 필요할 때란 생각이다.


죽음이란 알 수 없는 미래이고.

삶이란 당장 내게 닥친 현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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