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늘 홈런을 치지 못한다.
농구 선수가 모든 득점을 현란한 덩크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오버헤드 킥으로 모든 슛을 시도하는 축구 선수는 없다.
스포츠 하이라이트는 과정은 없이 현란한 결과만 보여준다.
하여, 모든 타자는 홈런을 치고 농구의 모든 점수는 덩크슛에서 오며 축구 선수 모두는 진기명기를 펼친다.
이것이 스포츠에만 국한될까?
미디어를 보자.
모든 사람이 완벽하다. 모두가 부자고, 모두가 해외여행을 가며, 모두가 맛난 걸 배가 터질 때까지 먹는다.
문제는 미디어가 너무나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온라인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가 없을 땐,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시야가 매우 좁았다. 기껏해야 신문과 TV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주위를 둘러보자. 몇 개의 화면이 있는가. 그 화면 안에는 도대체 몇 개의 미디어가 우리에게 구독료를 내라고 종용하고 있는가. 온갖 자극적인 콘텐츠는 난무하고, 심지어 이것들은 재빠르게 지나간다. 재빠르다는 건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보는 대로 살게 된다.
온갖 욕망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자라나게 된다.
브레이크 없이 자라는 욕망은 자아를 뒷전으로 하고 순간적인 자극만을 추구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힘주어 쓰지 않는다.
힘주어 살지 않는다.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그것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주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모든 글을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이다.
삶도 그렇다.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대체 이러한 스스로의 압박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앞서 말한 미디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비교'다. 미디어에 보이는 모든 건 '비교'라는 마음을 자극하는 트리거들이다. 빠르고 짧은 자극들. 생각을 멈추게 하는 요소들. 그저 욕망만을 따라가는 우리들.
글쓰기는 삶쓰기라고 내내 말하는 이유는, 그 둘은 이렇듯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를 보완하기 때문이다.
힘주지 않기 위해선, 힘을 빼기 위해선 유연해야 한다.
유연함은 나약함이 아니다. 나약함은 힘도 없고 유연함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유연함은 힘을 쓸 때 쓰고, 그러하지 않을 땐 뺄 줄 아는 지혜다. 내내 강직되어 있는 게 아니라, 긴장과 편안함을 두루 오간다. 편안할 때 제대로 된 힘이 나온다는 걸 유연함은 안다.
스포츠 선수들의 진기명기는 오래도록 갈고닦은 훈련에서 온다.
100번 훈련한 것 중, 놀라운 퍼포먼스는 하나 둘 나올까 말까다. 모든 순간을 힘주어 뛰지 않는다. 기회를 포착해 어느 한순간에 온 에너지를 끌어올려 성공한 시도들이 하이라이트 화면에 나오는 것이다.
타인의 삶도 하이라이트다.
그 이면엔, 하이라이트와는 정반대인 삶이 더 크고 짙게 배어있다.
우리의 일상을 보자.
'나'는 있는가. '생각'은 하며 살고 있는가. '유연함'을 잘 유지하고 있는가.
잘 모르겠다면.
차분히 자리에 앉아.
힘주지 말고 글을 써보기를 바란다.
힘 빼고 살아갈 내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