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부조리극>
명치끝에서 올라오는 과중한 부담이 늘 존재한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에 가고,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숨을 쉬는 한 상존하는 불안과 고독, 허무함은 어디에도 맡겨둘 데가 없다.
근원적인 불편함. 존재론적인 황망함.
그 누가 이러한 존재의 설움을 기획했는가. 어느 누가 숨 쉬는 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형벌을 내렸는가.
이러한 무거움과 불안은, 마치 숙제와도 같다.
숙제를 짊어진 존재는 한시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숙제를 마치고, 검사를 받아 통과해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텐데. 삶의 메커니즘은 누가 숙제를 냈는지, 그 숙제는 무엇인지, 정답은 무엇인지, 누구에게 어떻게 숙제 검사를 받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게 해 놓았다.
부조리의 기본은 의미를 찾으려는 열망과, 본질적인 세상의 무의미한 것이 충돌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무언가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세상과 세계는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물리적, 화학적 법칙이라는 자연의 질서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니고 그저 흘러가는 것이기에. 의미를 만들어내야 하는 건 우리다. 볕이 들고, 비가 오는 그 자체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다만 그럼에도 발생하는 의미는 모두 우리네 생각과 감정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의미를 갈구하는 욕구.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세계.
왜 태어났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꾸역꾸역 지나가고, 이는 마치 오늘 끝내지 못했는데 내일 또 주어지는 숙제와도 같다.
삶이라는 부조리한 숙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누군가는 '철학적 자살'을 통해 애써 세상의 부조리와 삶의 숙제를 부정할 것이다. 또는 부조리한 숙제를 인정하고 수용하던가. 그러나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건 '반항'하는 자들이다. 반항하는 자들은 철학적 자살과 수용의 단계를 지난 사람들이기도 하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도와, 그 과정에서 맞이해야 하는 좌절, 그리고 좌절 속에서도 꾸준히 삶을 이어가는 노력 그 자체로 우리는 훌륭히 숙제를 해 나아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언젠가 숙제를 낸 어느 절대자가.
갑작스레 숙제 검사를 할 수도 있으니, 일상을 숙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 라이프 인사이터 스테르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