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에세이
80년대.
높은 빌딩이 많지 않았던 시절, 온탕 마크가 새겨진 목욕탕의 높은 굴뚝은 일종의 랜드마크였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도 많은 가정엔 제대로 된 샤워 시설이나 욕조가 없었기에 어느 동네마다 대중목욕탕은 몇 개씩 있었다.
아빠와 함께 한 목욕탕은 내 기억에 대략 두어 번 정도.
그 기억이 가물가물한 건,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고 함께 목욕탕을 갔던 건 학교를 다니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건, 때를 밀기 싫어 울고 불고 했던 일.
뜨거운 물이 답답해 찬물에서 수영하던 일. (그래서 때가 불지 않았기에 어쩌면 아빠는 더 박박 내 몸을 때수건으로 밀으셨던 걸 테고...) 목욕을 마치고 나면 마셨던 우유. 삼각형 비닐 팩의 커피 맛. (빨대가 아닌 삼각 형 한 부분을 이로 뜯어 쭉쭉 빨아먹었던...) 가운데가 통통한 플라스틱 통의 바나나 우유. (지금은 바나나 '맛' 우유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목욕탕은 일종의 주중행사였다.
토요일 또는 일요일. 주말은 어김없이 목욕탕을 가는 날이었다. 일종의 의무와도 같았던 날.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 내가 갔던 곳은 엄마와 함께 한 여탕이었다. 당시만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남자아이를 목욕탕으로 데려오는 것이 용인되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용인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땐 친구들과 목욕탕을 함께 했다.
온탕보다는 냉탕에서 주로 놀았다. 다이빙을 하기도 했고, 거친 물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르신들한테 호되게 혼나기도 했지만, 우리의 놀이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목욕탕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이 있다면, 절대 화내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곤 했다.
군대 시절, 휴가를 나오면 나는 어김없이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땐 냉탕보단 온탕에... 아니 더 뜨거운 열탕에 더 많은 시간을 머물렀다. 군대에서 있었던 모든 어려움과 스트레스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때의 안도와 편안함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다시는 맞이할 수 없을, 극도의 평온함.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 소중한 추억을 남겨 주기 위해, 나는 아이들이 자그마했을 때부터 찜질방 목욕탕을 데려갔다.
아이들의 몸을 때수건으로 밀어주고. 아이들에게 내 등을 밀어 달라고 하고. 함께 계란을 까먹고, 아직도 여전한 커피 우유와 바나나맛 우유를 함께 먹고. 예전처럼 주중 행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언젠간 한 번은 떠올릴 기억과 추억.
지금 아이들은 나 보다 키가 더 크고, 해외 주재로 인해 목욕탕 갈 일이 없다.
한국으로 복귀하면 나보다 힘이 더 세진 아이들에게 등을 맡겨 보려 한다. 그날을 하루라도 더 빨리 맞이할 수 있길 바라고 있는 중임을 아이들은 알까.
나의 추억이 아이들의 추억이 될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간 아이들도 알겠지. 나의 등이 예전보단 많이 작아졌다는 걸. 큰 산과 같은 존재였는데, 이제는 제법 요소요소에 초라함도 장착하고 있다는 걸.
어쩐지 오늘은 뜨끈한 열탕에 몸을 푹 담가, 시선을 위로하고 잠시 쉬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