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Nov 15. 2017

그녀의 사진이 줄어드는 이유

그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자체 발광이라고 해도 좋고 후광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 반짝이진 않았지만, 뽀얗게 올라온 그 빛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로맨틱한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바라볼 때나 느끼는 그 뽀얀 느낌. 눈에 뭔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눈앞에서 그 광경을 직접 보니 스스로도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적 그리 바라고 바라던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그 기운이, 그녀의 얼굴을 통해 나온 것이란 걸. 내가 가진 결핍이 나로 하여금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게 한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결혼할 사람은 정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냐고 질문하면 나는 서슴없이 그렇다고 답한다. 


화목한 기운이 그녀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왔다곤 하지만, 빛이란 아름다운 사람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즉, 그녀는 예쁘다는 뜻이다. 작고 찢어진 내 눈이 '깜빡'일 때, 그녀의 큰 눈은 '껌뻑'인다고 표현해야 함이 옳다. 쌍꺼풀이 드리우지 않으면서 큰 눈은 선한 인상을 주면서도 고고한 느낌을 줬다. 코는 적당하게 오뚝하고 입술은 너무 얇지도 또 너무 두껍지도 않게 도톰한 것이 자꾸 그것을 바라보게 했다. 목 중간까지 오는 단발머리와 동그란 얼굴형이 잘 어울려 기품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발랄해 보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난 그렇게 한눈에 그녀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사진을 찍는 것은 매우 큰 즐거움이었다. 

옆에서 퉁퉁 불은 내 얼굴이 못나게 나와도,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 그저 좋았다. 이리저리 찍어도 예쁘고 분위기 있게 나오는 것이 사진 찍는 재미가 영 쏠쏠했을 정도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을 찾아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는 여전히 예쁘다.
그런데...


그렇다. 

사실이다.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옆에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면 내가 정말 결혼은 잘했구나란 안도감이 들 정도다. 큰 눈망울은 여전하다. 도톰한 입술과 기품 있는 단발머리도 그렇다. 가끔 연애 때나 하던 손으로 머리 쓰다듬어주기를 하기에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그때의 그 예쁨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사진첩을 뒤져보면 그녀의 사진은 없다. 

물론 아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부모가 되면서 우리가 자처한 일이다.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진으로 남겨놔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나의 기록을 남겨준 우리 부모님께도 감사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진이 이토록 없다는 건 뭔가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는 것이다. 가끔은 아이들과 사진을 찍을 때도, 나와 두 아들 녀석이 모델이 되고 그녀는 우리 삼형제(?)를 찍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아이들과 서보라고 하면 그녀는 애써 거절하고 만다. 나 또한 그녀를 억지로 사진기 앞으로 내세우진 않는다. 가끔 연애 때 기분을 내며 다정하게 셀카를 찍을 때나 마지못해 찍는 그녀는, 그 순간까지도 얼굴을 크게 커버할 선글라스를 주섬주섬 찾아낸다. 


언제부터 그녀는 사진 찍기를 즐기지 않았을까?

답은 쉽다. 아이를 낳고 난 뒤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이들이 태어나면 모든 관심과 시선은 아이들에게로 향한다. 기어서 찍고, 뒤집어서 찍고, 걸어서 찍고, 기특한 모습 하나하나. 7살이라 찍고 9살이라 찍고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모습을 담는데 여념이 없다.

이뿐이 아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원하지 않는 몸의 변화를 맞이했다. 여자로서 거울 앞에 서서 잘록한 몸의 어딘가를 뽐내던 자태가 원하지 않게 바뀐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옷은 검은색이기 일쑤고, 사이즈는 프리를 찾는다. 구입하는 옷의 디자인과 색감이 거기서 거기다. 물론, 나도 아저씨가 되며 변한 체형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은 그냥 운동부족이나 자기관리의 단편이다. 하지만 그녀의 변화는 다르다. 아이 둘을 낳고 난 후, 아무리 관리를 한다한들 큰 변화는 있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냥 지나갈 것들도, 스스로는 얼마나 신경이 쓰일지 입장을 바꿔보면 느껴진다. 젊었을 때와 다르게 급격하게 바뀐 체형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나라면, 많이 속상하고 우울한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이미 그러한 과정은 이미 지나쳤을지 모른다. 그런 고민이나 한탄을 할 새도 없이 아이들은 자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가 참 예쁘다. 

그리고 좋다. 내 눈에 뭔가 변해 보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변해도 좋은 건 그런 이유가 있다. 애초에 그녀를 사랑한 건 빛이 나던 얼굴과 몸매뿐만 아니라 그녀의 마음과 행동 하나하나 모두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에게 보여주는 존중과 믿음, 신뢰와 격려는 사람 마음을 참 편하게 한다. 그러니 언제라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그리고 연애할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좋은 엄마'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고맙다. 난, 그녀에게 그렇게 강한 모습이 있으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다. 두 아들을 키우려면 그래야 하긴 하지만.


'그녀'가 나의 아내인 것이 참 고맙다. 

글을 쓰는 내내 아내를 '그녀'라고 표현한 건, '그녀'는 '그녀'이기 때문이다. 두 아들의 엄마이기 이전에, 한 남자의 아내이기 이전에. 그녀는 꾸미기를 좋아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얼굴에서 뽀얗게 빛이 나던 여자였다. 요즘이야 휴대폰 카메라에 얼굴을 뽀얗게 하거나 눈망울을 말 그대로 동그랗게 만들어주는 앱이 있긴 하지만, 어디 본연 그대로의 모습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런 것 없이도 그녀의 얼굴은 뽀얗고 눈망울이 동그랗다. 예전의 사진에서도 그렇고, 내 기억에도 그러하고 지금 내가 보는 그녀도 마찬가지. 앞으로 억지로 사진을 찍을 요량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내가 기술을 좀 더 살리거나 배경을 잘 맞추어서 그녀의 사진을 찍어보는 것이 좋겠다. 분위기 있게, 예쁘게 나오면 그녀도 마다할 리 없지 않을까? 


P.S

사실, 나도 내 얼굴 사진 찍는 것을 그리 즐기지는 않는다. 

찍어봤자 그렇고 그렇게 나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 그래. 생각해보니 둘이 함께 찍어 내가 그녀를 위해 외모 몰아주기를 하는 것이 어쩌면 내가 사진 찍는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빠르겠단 생각이 든다. 아니면, 둘 다 언제나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쓰고 찍거나.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선택!)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매거진의 이전글 흐바르(Hvar)가 나에게 천천히 가라고 말했다.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