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지나 세상을 살아가는 자로
이글은 "생각한다는 것" 마지막 챕터인 3장 세번째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을 읽고 쓴 독후감 입니다.
1. 예수님의 기도, 그리고 보내심의 의미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유언 같은 기도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제자들과 앞으로 믿게 될 이들을 위한 기도로 마음을 쏟으셨지요.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사옵니다." (요17:21-18)
이 기도는 단순한 중보가 아니라, 세상 속에 살아갈 제자들에게 주어진 정체성과 사명을 선언하시는 파송의 말씀이었습니다.
2. 세상이란 무엇인가: 창조, 적대, 그리고 사랑
요한복음은 세상을 세 가지 시선으로 보여줍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입니다. 그분의 손에서 나온 선한 창조물입니다.
둘째, 그 세상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적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표현처럼요.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지요.
이 세 가지 시선은 서로 충돌하는 듯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긴장 속을 걷는 여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을, 우리도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제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3. 하이데거와 죽음: 불가능성의 가능성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 즉 죽음을 자각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을 기획할 수 있다고 했지요. 죽음은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절대적인 한계이지만,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게 하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간은 선택의 여지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지만, 그 던져짐을 딛고 미래를 향해 자신을 능동적으로 던지는 자가 될 수 있다고요.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저는 뭔가 의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직면하는 것에는 탁월했지만, 그 죽음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하지 못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 죽음이 초래하는 궁극적인 불가능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깊이 성찰했던 죽음 앞에서, 결국 그의 사상은 철학자의 언어로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4. 죽음을 넘는 삶, 일상의 태도까지도
그에 반해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자각할 뿐 아니라, 그 너머의 생명을 믿고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상징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실존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 부활의 생명을 믿으며, 사랑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존재로 세상 속에 보냄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넘어선 존재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해 세가지 삶의 태도를 알려줍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과 남이 함께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양심은 공동의 지식'입니다. 정직과 공정성의 출발점은 이 양심에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 부름받은 자라면,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배운 양심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나' 중심이 아니라 '우리' 중심의 사고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얼마 전 들었던 한 강연이 떠올랐습니다. 강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낄끼빠빠를 따지지 않는다. 자신이 맡은 일이 아니어도 눈치 없이 끼어들고, 마치 자기 일처럼 감당한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됐다'는 지점에서 한 걸음 더 가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프로다.'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어떠해야 할까? 죽음을 넘어선 존재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삶과 일 속에서도 그런 태도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보내심 받은 존재라면, 일의 끝이 어디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사랑의 방식으로 끝을 넘어서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을 넘은 존재는 단지 신비한 구원을 받은 자가 아니라, 오늘의 삶과 일 앞에서도 더 깊이 책임지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불러내어졌고, 다시 그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은 세상이 아닌, 삼위 하나님 안에서 나옵니다. 그분과의 연합, 말씀과 기도와 성찬을 통해 공급받는 '사랑'이 우리를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게 합니다.
이 장을 읽으며, 저 역시 세상 속에서의 저의 자리와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흘러야 할 곳에서 나도 모르게 경쟁하고,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5. 스크루테이프의 교훈: 나는 나, 너는 너?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악마들은 지옥의 철학을 전파합니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구호 속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이기적인 계산, 관계의 파괴가 담겨 있지요.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삶은 다릅니다. 넘치도록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삶입니다. 타인의 필요를 나의 것처럼 여기고,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이지요. 이 사랑이야말로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는 가장 뚜렷한 증거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6. 마무리: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철학적으로 성찰했지만, 그 죽음을 넘는 길은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죽음을 넘으셨고,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을 지나,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고, 이번 장이 우리에게 들려준 고백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이 깊이 다가올수록,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더 밝게 빛나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제가 소망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