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3 생각한다는 것 마지막 하브독토(토론요약)

생각이란 믿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by 리얼팔


『생각한다는 것』 하브루타 독서토론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시간입니다.


총 8편의 독후 에세이와 7편의 독서토론 요약글이 이번 하브독토를 통해 창작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준파이퍼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하브루타는 실천적 배움의 과정이고, 일상에서 마지막 성찰이 ‘쓰기’로 나타나거든요. 성찰이 깊고 남겨질수록 삶의 실천이 가까워지기 때문에, 성찰은 변화를 가져오고 성장은 결국 변화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리플렉션의 마무리, 그 ‘글쓰기’가 저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하베르들의 참석이 아쉬운 가운데 문장나누기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문장나누기 서두에서 저는 이번 글을 읽으며 느낀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번 3장 두번째 챕터에서는 철학자 체스터튼에게 꽂혔습니다. 아주 특이한 사람이잖아요. 세례도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오히려 유물론이나 진화론 같은 반기독교적인 서적을 통해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은 케이스니까요.

그 사람이 기독교에 대해 말할 때, 단순히 교리나 진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연애 사건’이라고 표현했잖아요. 저는 그 표현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침묵하거나 서둘러 고독을 택함으로써 계속해서 은폐한 그 무엇이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땅 위를 걷는 동안에 너무나 커서 우리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때론 나는 그것이 그분의 환희가 아니었나 하고 상상해본다.”

이 말이 너무 멋지고, 또 궁금했어요. ‘그분의 환희’가 과연 뭘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고난을 준비하시던 그 침묵과 고독. 그 속에 담긴 환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죽음을 앞두고도 품은 환희—그게 예수님의 마음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177페이지에 이런 문장도 있죠.

“우리가 보편적인 원리, 보편적인 진리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볼 때 그때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욥기가 생각났어요. 욥이 고난당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친구들에게 말하지만, 친구들은 자기들의 신학 지식, 진리를 들이대잖아요. 그 진리가 오히려 욥에게는 날카로운 칼이 돼요. 맞는 말이긴 한데, 사랑 없이 전해지는 진리는 결국 욥을 찌르는 무기가 되거든요.

하나님은 사랑이시잖아요. 그 사랑이 없이 전해지는 진리는, 그저 울리는 꽹과리 같은 거죠.

그래서 체스터튼의 말에 공감했고, 동시에 이성도 중요하구나, 그런 생각도 하게 됐어요. 성령의 인도하심도 필요하지만, 이성적인 사고도 꼭 필요하구나. 이 책의 주제가 바로 그런 거더라고요. 논리적으로 이해한 다음에 감성적으로 믿어져야 비로소 결단하고 실천할 수 있으니까요."


SK 회장님은

"저는 이번에는 철학자보다도 사도 바울의 논리에 꽂혔습니다. 178페이지부터 나오는 바울의 구원과 믿음에 관한 논리를 정리한 부분이 너무 좋아서요. 믿음과 구원에 대해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것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논리적으로 정리해놓은 걸 보고 큰 도움이 됐어요.

우리가 보통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알고, 또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도 하지만, 왜 그런지에 대한 논리적 설명은 부족하잖아요. 이 책에서 그걸 잘 정리해줘서, ‘아, 이렇게 정리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특히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죠.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알고 싶고, 사모하고, 진리에 열려 있는 상태여야만 들음이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에 이렇게 공감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너무 쉽게 ‘예수는 주시다, 그리스도시다’라고 고백하잖아요.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그 고백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어요. 우리는 놀라는 단계가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놀라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SK회장 님은 "맞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고백해버리는 게 아닌가. 진심으로 고백하지 않거나, 아니면 내 마음도 잘 모른 채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또 요즘엔 내가 주인인 삶을 살고 있으니까,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기가 참 어렵죠. 풍요 속에서 신앙 고백이 쉽게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3장에서 정말 깊은 인상을 받은 문장이 있어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그 사랑이 전해진다.” 우리가 이 진리를 감동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결국 다시 신앙을 세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요. 말은 쉽지만, 실천하려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회개도 많이 했습니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걸 목표 삼아 살아야겠다 결심했어요."


문장나누기를 들으신 후 준파이터님은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주셨습니다.

"제가 코칭하는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확실히 두 분은 ‘맥락적 대화’가 너무 잘 되시는 하베르세요. 가끔 다른 하베르들과는 대화가 밀도 있게 안 되는 경우도 있어요. 텍스트를 머금지 않은 채 표면적 이야기만 주고받는 하브루타는 사실 진짜 하브루타가 아니죠.

그런 면에서 보면 두 분은 이미 관계성도 잘 쌓여 있고, 문해력도 있으셔서 진짜 하브루타다운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듣는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엿듣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그 포인트는 꼭 짚어드리고 싶습니다."


삶의 중심의 변화, 믿음의 주체가 바뀌는 일


첫번째 질문 : “구원에 이르는 믿음, 곧 신앙은 삶의 중심에 누가 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인가? 그리스도이신가?


이 질문은 단순히 신앙의 방향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말씀이었습니다. 책의 180쪽, 문장을 함께 나누며 시작한 하브루타는 결국 삶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이어졌습니다.


준파이퍼님은 다음과같은 생각을 공유해 주셧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삶의 중심의 변화는 삶의 주체의 변화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주체이신가? 내가 주체인가?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말씀은 삶의 중심이 ‘나’에서 ‘그리스도’로 완전히 옮겨졌다는 고백입니다."


출애굽기의 여정이 세례와 자기 부인을 상징한다고 해석해 주신 목사님의 설명은, 신앙 여정의 구조를 새롭게 보게 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세례를 의미하고, 광야는 자기 부인의 시간이며, 가나안은 순종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담임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딸은 가장 나중에 기도하고, 불편하고 껄끄러운 사람부터 먼저 기도한다.”

이 고백을 들으며, 자기 부인은 대단하고 거창한 것보다 오히려 타인을 위한 작은 마음씀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작고 따뜻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세상으로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두번째 질문 :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람답게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거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가 또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신실한 현존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바로 지금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현실 속의 신앙 실천을 묻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실하게 거주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태도를 의미할까요? 책은 세 가지 태도를 제시합니다.


기량의 성실함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과 남이 함께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

양심의 윤리 “양심은 공동의 지식이며, 정직과 공정성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부름받은 자라면,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배운 양심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중심의 사고 “언제나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나’ 중심이 아니라 ‘우리’ 중심의 사고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읽으며, 문득 얼마 전 들었던 한 강연이 떠올랐습니다.


강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낄끼빠빠를 따지지 않는다. 맡은 일이 아니어도 눈치 없이 끼어들고, 마치 자기 일처럼 감당한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됐다’는 지점에서 한 걸음 더 가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프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어떠해야 할까? 죽음을 넘어선 존재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삶과 일 속에서도 그런 태도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요? 보내심 받은 존재라면, 일의 끝이 어디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사랑의 방식으로 끝을 넘어서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 에너지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찬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세 가지 기도를 기억하실 겁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위한 기도—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기도.

두 번째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그들이 하나 되게 하시기를 구한 기도.

세 번째는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자들을 위한 기도—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기를 바란 기도.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 사랑이 저절로 실천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기에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 아버지 안에 예수님,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 그 연합 말입니다. 그 연합 안에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성찬을 통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SK 회장님께서 특히 ‘성찬’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이 대목에서 저는 깊이 있는 통찰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찬이라고 하면, 절기 때마다 예수님의 살을 상징하는 떡과,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혹은 포도즙)를 나누는 의식을 떠올립니다. 아마 교회 안에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것만을 ‘성찬’이라고 여기는 문화 속에 익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SK 회장님은 굳이 그것만을 성찬으로 한정짓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좁은 이해에 어떤 부족함이 있다고 보신 듯합니다. 그래서 성찬의 의미를 확장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배를 마친 후 주일마다 함께 나누는 식사—성도 간의 식탁의 교제—이야말로 예배의 연장이며, 성찬의 또 다른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식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공동체의 사랑과 연합을 표현하는 거룩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책에서도 성찬을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는 시각이 등장한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저희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떠올랐습니다. 우리 목사님도 여러 차례에 걸쳐 "그리스도인에게 식사는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중요한 순간으로서의 식사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후의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내려가 어부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책망도, 설교도 아닌—바로 밥을 먹이시는 일이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요한복음 21:12) 예수님은 사랑을 말씀하시기 전에, 사랑을 '식사'로 표현하셨습니다.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삭개오의 집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서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의 길 위에서도… 예수님은 식사를 통해 사랑을 전하셨고,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주 나누는 식사도 그저 ‘밥 한 끼’가 아니라, ‘작은 성찬’이며 ‘작은 예배’일 수 있습니다. 그 의미를 다시 떠올리고 회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공동체의 예배를 더 온전히 만드는 일이 아닐까요?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연애 사건이다.”

소그룹에서 이 질문을 가지고 토론을 나누다 보니, 제 간증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결국 SK 회장님은 한마디도 못 하셨습니다. 죄송한 마음도 있었지만, 제게는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생각한다는 것』 하브루타 독서토론을 시작하면서부터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말씀을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대해 느낀 점을 독후 에세이 형식으로 정리했고, 토론이 끝난 후에는 하브루타 요약까지도 꾸준히 정리해 왔습니다. 그렇게 글로 쓰는 과정이 쌓이면서 점점 더 깊은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가 또 다른 확장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욥기 묵상이었습니다. 욥기를 천천히 읽으며, 각 장을 하나하나 묵상하고, 그 내용을 또 에세이 형식으로 정리해 갔습니다. 특히 욥기 1장과 2장을 묵상하던 때,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너는 어디서 왔느냐?” 물으셨을 때, 사탄은 “세상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왔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오직 “욥”을 지목하시며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문득, 욥의 이름 위에 저의 이름이 겹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확신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그렇게 특별한 관심을 두셨다면, 나에게도 그러하시지 않을까?’ 이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시선을 처음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욥기의 2장의 마지막 부분, “욥처럼 의로운 자가 없느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제게도 하시는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그날 아침, 수영장으로 가는 길.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문득 이 찬양이 마음에 스며들더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도무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었습니다.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내 안에서 역사하고, 내 영혼을 흔드는 그 경험.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저를 만지고, 빚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감정은, 이 체험은—신학적 정의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나 사이에 벌어진 사랑의 사건, 말 그대로 연애 사건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렇습니다.

이 책의 중심 주제인 ‘생각한다는 것’, 왜 지성이 필요하고 왜 생각하고 이해하고 알아가는 일이 신앙생활에 필요한가를 나의 말로 정리해 본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의 핵심은 믿음이며, 이 믿음이 더욱 신실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요? 이 책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미암느니라.”

이 말씀처럼 먼저 ‘들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이 ‘듣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어줍니다.

듣는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이며, 알게 되면 그 다음으로 놀라움을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2000년 전 유대인과 로마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주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실로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주’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기에, 예수를 그렇게 고백하는 것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예수를 믿는 일이 이처럼 놀라운 사건일까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놀라움’을 불러오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놀란 다음에는, 그 놀라움을 곱씹으며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따르고,

받아들인 이후에는 그것을 지속할 것인지, 떠날 것인지의 결정이 뒤따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를 놀라게 할 만한 것은 무엇일까요?

물질, 이 주제를 피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신명기 6장 쉐마 말씀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구절이 있죠.

여기서 ‘힘을 다하여’라는 표현에는 ‘네 전 재산을 다하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설명을 듣는 순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뭐야… 이단도 아니고…”

아마 저도 모르게 놀랐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이 표현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 말은 이단에서처럼 자기 재산을 몽땅 바쳐 가족을 궁핍하게 만들고, 결국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그런 극단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번 하브루타 독서토론 첫 시간에 쓴 독후 에세이 가운데 작가의 다음 문장을 인용하며 다음 글을 썼습니다.

“내가 일했다고 그만큼 받을 만한가요?

언제나 그것보다 더 많은 덤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순간 마음이 멈춰 섰습니다.

문득 내가 지금껏 받은 것들을 떠올려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흘린 땀보다 더 넉넉히 주어졌던 것들.

나 혼자였다면 결코 쌓을 수 없었을 성과들.

삶이란, 언제나 나의 몫 이상을 내어주는 은혜의 그릇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과 수고에 비해 훨씬 넘치는 열매를 거두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나와 어깨를 맞대고 함께 걸어가는 이웃들 덕분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한 켠에 ‘감사’라는 이름의 빛을 켜두고 싶어졌습니다.

받은 것들 앞에 고개 숙일 줄 아는 마음,

나누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은총임을 아는 마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웃에게 불친절할 이유도,

작은 손해에 마음 상할 까닭도 없더군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삶은,

손익을 따지기보다 사랑과 연대의 눈으로 바라볼 때 더 깊고 따뜻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내 소득이란 것도 하나님과 이웃의 창조와 도움 덕분임을 고백하게 되었고,

이 고백은 곧 ‘내 물질’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저 받은 은혜로 여기게 되었고,

허투루 사용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과 이웃에게 덕이 되게 사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게 된 것이죠.

그렇게 볼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 드린 ‘전 재산’이 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믿음의 여정에 있어서

알고, 놀라고, 받아들이고, 지속한다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 모든 과정은 ‘생각’ 없이는, ‘지성’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생각이란 믿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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