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신 것
『생각한다는 것』 3장 두 번째 파트(160~210쪽) 하브루타 독서토론
『생각한다는 것』을 읽으며 하브루타 방식으로 독서토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책은 저를 자주 놀라게 만듭니다.
앞선 토론에서 나누었던 인상깊었던 내용이 다음 독서범위에서 등장하고,이전 범위의 독서에서 떠올렸던 생각이 다음 읽을 범위에서 더 깊게 펼쳐지기도 합니다.
마치 책과 제 생각의 흐름이 서로 호응하며 따라오고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번 장의 서두에서는 예수님의 논리적인 사고 방식이 세 가지 예로 소개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자비가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
사두개인과의 부활 논쟁에서 “죽은 자도 산 자로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
그리고 다윗의 주로서의 메시아 논변까지.
예수님의 말씀이 단지 비유나 은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사유로 구축된 논리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체스터턴, 이성의 끝에서 만난 하나님
이번 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체스터턴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성주의와 무신론, 유물론의 세계를 샅샅이 탐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히려 그 사상들 속에서 신앙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비판하던 주장들이 서로 상반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가 지나치게 비관적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너무 낙관적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하얀 세계를 덮은 까만 가면’이기도 하고,
동시에 ‘까만 세계를 덮은 하얀 가면’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체스터턴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기독교가 거짓이라면, 한 방향으로만 틀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정반대 이유로 동시에 공격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흔적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논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논리 너머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환희(mirth),
즉 기쁨의 신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상상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거니시는 동안 끝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신 것, 그것이 바로 그분의 환희였던 것은 아닐까요?”
체스터턴은 신앙을 “이론(theory)이 아니라 연애(love-affair)”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진리를 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무릎 꿇고 다가오신 이야기,
예수께서 눈물로, 분노로, 침묵으로 우리를 품으신 이야기. 그 사랑의 깊이가 너무나 커서,
우리는 끝내 그분의 미소, 그분의 환희를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이번 장에서 다시금 마음에 깊이 새겨진 말씀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을 듣는 사람’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 행위가 아닙니다.
마음을 기울여 듣고, 알고 싶어하고, 사랑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믿게 되려면 '알고 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예수는 주시다.”
이 고백은 당시 유대인과 로마인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는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이 고백이 주는 당혹스러움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내어주는 삶은, 선물 받은 삶에서 시작됩니다
207쪽의 문장이 오래도록 제 안에 머뭅니다.
“내어줌의 가능성과 현실성은
선물로 받았다는 전제가 먼저 있어야 한다.
삶을 선물로 받지 않고서는, 내어줄 수 없다.”
삶은 내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물을 다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제사의 삶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삶에서 시작되는 자리일 것입니다.
세 가지 질문을 남기며
이 장을 읽고 난 후, 제 마음속에 세 가지 질문이 남았습니다.
1. 하나님께서 끝내 감추신 ‘그분의 환희’란 과연 무엇일까요?
2.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이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금 당혹스럽게 다가오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고백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3.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일까요?
우리의 말투, 소비, 관계, 시간 사용, 결단의 방식…
무엇이 먼저 변해야 할까요?
맺음말
체스터턴이 한 말을 떠올리며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이제 이 혼란스러운 책을 덮으며, 기독교의 기원이 된 그 이상한 작은 책, 복음서를 다시 펼쳐 봅니다. 그리고 그 복음서 속의 한 인물, 예수님께서 이 모든 철학자들 위에 서 계신 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분은 우셨고, 분노하셨으며,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체스터턴은 그분 안에 끝내 숨기신 무언가가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바로 환희, 너무 커서 우리에게 다 보여주실 수 없었던 기쁨의 신비였습니다.
신앙은 단지 무거운 율법의 요구가 아니라,
기쁨과 환희를 향한 하나님의 초대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보고,
그 진리 안에서 사랑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기쁨의 사람, 자유의 사람,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그 여정을 계속 걸어가고자 합니다.
체스터턴처럼, 질문과 혼란을 지나,
결국 사랑의 확신에 이르는 그 길 위에서,
그 이상한 작은 책을 펼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