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한다는 것』 하브루타 독서토론 두 번째 시간을 준비하며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깊이 관여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남긴 유명한 변명입니다. 그는 자신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그저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변명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이름 붙이며, 아이히만의 무비판적 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았는지를 고발했습니다. 악의 핵심은 사악한 동기보다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저는 이 물음을 교회 안에서 자주 떠올립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자주 “하던 대로”, “위에서 시키는 대로”, “전통이니까”라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순종하고 있지는 않은가. 신앙이란 이름으로, 질문 없이, 공감 없이, 익숙한 관행만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의 전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감정에만 휘둘리게 하고, 유행에만 따라가게 만들면 논리도 성찰도 필요 없습니다. 그는 심지어 오늘날의 교회가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데 있어 악마의 ‘동맹자’처럼 행동한다고 경고합니다. 생각 없는 순종은 때로 사탄의 전략과 나란히 서 있게 된다는 말이죠. 듣기에 불편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말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역시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남의 지배를 받는 종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계몽이란 ‘자기 이성으로 생각할 용기를 갖는 것’이라 했습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란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왜 이 일을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공감 없이 하는 순종은 결국 누군가를 해치게 됩니다.
악한 의도가 없더라도, 생각 없이 반복된 결정은 타인을 아프게 하고, 공동체를 병들게 하며, 결국 스스로도 길을 잃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무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누군가를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걸음 또한 ‘공감’입니다. 정죄하기보다, 왜 그런 판단을 하게 되었는지, 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먼저 묻는 것입니다. 아렌트가 말했듯, 악의 시작은 ‘공감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오히려 그들을 향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이 결정이 정말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나요?”
“우리의 감정은 정말 성경적인 것인가요?”
이 질문들은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 작은 불씨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외부에서 강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묻고 되짚는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그 과정이 시작될 때, 믿음은 비로소 살아 있는 믿음이 됩니다.
저는 종종 스스로에게도 이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나는 생각하며 믿고 있는가?”
“나의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향해 있는가?”
“내가 따르고 있는 그 길,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있진 않은가?”
믿음은 본래 깨어 있는 여정이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뜨는 일입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웃의 고통을 느끼고, 나의 판단이 닿는 자리를 살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입니다.
사람이 만든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리 위에 서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깨어 있지 않은 신앙은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삶을 무겁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에게 이런 질문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금 내 믿음은,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는가요?
이 글은 『생각한다는 것』 1장 세 번째 파트
〈생각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읽고 쓴 제 두 번째 독후감입니다.
앞으로도 매 주 한 편의 독후 에세이와, 이어지는 하브루타 독서토론의 기록을
연재 브런치북으로 이어갈 예정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하브루타 모임에서 나눈 생생한 대화의 현장을 함께 전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