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은퇴 5년 차,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다. 의사가 결과지를 보며 말했다. "혈압이 또 올랐네요. 당뇨 수치도 조금 높고. 약은 꼬박꼬박 드시고 계신 거죠?" "네, 먹고 있습니다." "운동은요?" "자전거 타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래도 나이가 나이니까, 계속 관리하셔야 해요." '나이가 나이니까.' 그 말이 묘하게 걸렸다. 병원을 나와 남강변 벤치에 앉았다. 손에 든 결과지를 보며 생각했다. 약봉지가 점점 두터워진다. 아침마다 삼키는 알약들. 혈압약, 당뇨약, 콜레스테롤약. 이것은 경고가 아니라 사실의 기록이었다. 몸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낡아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대학 동기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가 어제 갔어. 발인일 이틀 후." 아, ○○이. 86학번. 나와 같은 나이.
장례식장은 조용했다. 영정 사진 속 그는 웃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 그 모습 그대로. 하지만 관 속의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조문객들이 수군거렸다. "아직 젊은데..." "갑자기..." 하지만 알았다. 갑자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죽음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다만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을 뿐.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은퇴 후 5년. 자전거를 타고, 책을 읽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부지런히 살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맞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강물은 늘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정오의 태양이 가장 밝은 빛을 내뿜고 서서히 기울어 가듯, 삶의 가장 자유로운 시간을 맞이한 지금, 역설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느낀다. 그날 밤,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펼쳤다.
케이건은 예일대 철학 교수다. 그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혼은 없다. 죽으면 끝이다. 그것이 전부다." 차가운 선언이었다.
대부분의 책들은 죽음 앞에서 위안을 준다. 영혼은 영원하고, 내세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것이라고. 종교는 이런 희망을 판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산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 모든 위안을 거부한다. "당신에게는 영혼이 없다. 당신은 물리적 존재일 뿐이다."
물리주의(physicalism). 케이건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그냥 몸이다. 뇌가 작동하면 생각하고, 심장이 뛰면 살아 있고, 그것들이 멈추면 끝이다. 영혼이 없다면? 내세도 없다. 천국도, 지옥도, 윤회도 없다. 죽으면 그냥 없어진다. 완전한 비존재.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너무 냉정하지 않은가? 죽음 앞에서 이렇게 차갑게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안개가 걷히듯, 삶의 윤곽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영혼과 내세를 믿는 이유는 명백하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완전한 소멸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위안이 정말 위안인가? 케이건은 묻는다. "불멸이 과연 좋은 것인가?" 영원히 산다고 상상해 보라. 1천 년, 1만 년, 100만 년.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모든 책을 다 읽고, 모든 사람을 다 만나고 나면? 권태. 지루함. 의미의 소멸. 불멸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책을 덮고 남강변을 걸었다. 케이건의 논리는 차갑지만 정직했다. 그리고 그 정직함 속에서 묘한 위로를 느꼈다. 영혼이 없다는 것. 죽으면 끝이라는 것. 그것은 허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회사를 다닐 때, 마감이 있는 프로젝트와 마감이 없는 프로젝트의 차이를 알았다. 마감이 있으면 집중한다. 우선순위를 정한다. 불필요한 것을 버린다. 그리고 완성한다. 마감이 없으면? 계속 미룬다. 나중에, 나중에. 그러다 결국 하지 않는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케이건은 "박탈 이론(deprivation account)"을 설명한다. 죽음이 나쁜 이유는 고통 때문이 아니다. 죽음 자체는 아무런 경험도 아니기 때문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왜 나쁜가? '살 수 있었던 시간'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30세에 죽는 것이 80세에 죽는 것보다 더 나쁜 이유는, 50년이라는 삶의 가능성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지금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은퇴 후 5년. 자유로운 시간을 얻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정말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케이건은 말한다. "적절한 죽음 인식(appropriate death awareness)"이 중요하다고. 죽음을 항상 의식하며 사는 것은 병적이다. 매 순간 "나는 곧 죽는다"고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음을 완전히 잊고 사는 것도 문제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며 중요한 것들을 미룬다. 적절한 균형. 죽음을 알되, 그것에 압도되지 않기. 마감을 아는 프로젝트처럼 살기.
커피를 마신다. 뜨거울 때 마셔야 맛있다. 식으면 맛이 없다. 삶도 그렇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뜨겁다. 내일은 조금 식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마셔야 한다.
자전거를 탄다. 페달을 밟으며 생각한다. 언젠가 이 자전거를 탈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무릎이 아프거나, 균형을 잃거나, 아니면 그냥 죽거나. 그렇다면 오늘 타야 한다.
남강변을 달린다.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강물이 반짝인다. 이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소중하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후, 며칠간 우울했다. ○○이의 죽음이 슬펐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부재'가 슬펐다.
케이건은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을 구분한다. 나의 죽음은 나에게 나쁘다. 왜냐하면 내가 살 수 있었던 시간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죽음은 나에게 슬프지 않다.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죽음은 다르다. 타인이 죽으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슬프다. 왜? 그 사람의 '부재' 때문이다. ○○이는 이제 없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고통도, 슬픔도, 후회도 없다. 하지만 남은 우리는 그를 그리워한다. 다시는 그와 술을 마실 수 없다. 다시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 다시는 그에게 전화할 수 없다. 슬픔의 본질은 '죽음'이 아니라 '부재'에 있다.
며칠 후, ○○이의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물건을 정리하다가 아저씨 사진이 나왔어요. 대학 때 MT 사진인 것 같은데..." 그 사진 속에서 우리는 젊었고, ○○이는 웃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이는 없지만, 그의 흔적은 남았다. 사진, 기억, 그가 내게 했던 말들. 그리고 깨달았다. 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책임이다. 언젠가 내가 죽으면, 누군가 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내가 남길 흔적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때, 무엇을 떠올릴 것인가?
5편에서 우연을 인정했다. 6편에서 지리를 인정했다. 7편에서 유전자를 인정했다. 8편에서 수치심을 인정했다. 이제 9편에서 죽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인정은 체념이 아니라 책임이다. 유한하기에, 남은 시간이 소중하다. 유한하기에, 남길 흔적이 중요하다.
남강 다리 위에 섰다.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강물은 여전히 흘렀다. 멈추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케이건의 말이 떠올랐다. "죽음은 끝이다. 하지만 그 끝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장을 쓸 때, 마침표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문장은 영원히 계속된다. 쉼표만 있고, 끝이 없다. 그러면 그것은 문장이 아니라 그냥 단어들의 나열이 된다. 마침표가 있기에 문장이 완성된다. 끝이 있기에, 시작이 의미를 갖는다. 끝을 알기에, 중간 과정을 더 진지하게 선택할 수 있다.
은퇴 후 5년. 정오의 태양처럼, 가장 밝은 시간을 지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10년일 수도, 20년일 수도, 내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안다. 이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소중하다.
진주에서 왔고, 한반도에 살며, 유전자 안에 있고, 수치심을 느끼고, 죽음을 향해 간다. 이 모든 것이 조건이다. 하지만 그 조건을 알기에, 남은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 마침표가 있기에, 지금 이 문장이 소중하다.
오늘도 자전거를 탄다. 페달을 밟으며 남강변을 달린다.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이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완전히 나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케이건은 책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죽음은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명료하게 살게 한다." 맞다. 죽음을 공부하며, 삶이 더 선명해졌다.
은퇴 후 5년, 나는 죽음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소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