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함께 춤을』을 읽고
1부. 시스템 속의 떨림
25년간 ‘합리성’이라는 깃발 아래서 일했다. 숫자는 감정을 허용하지 않았고, 회의실의 공기는 개인의 떨림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15년 전, 협력업체에 부당한 단가 인하를 강행하던 날이 선명하다. 회사는 원가절감 목표를 위해 모든 협력업체에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이 조치가 그들의 생존을 위협할 것임을 알았다. 상무는 잘라 말했다. “그게 우리의 목표다. 감정적으로 굴지 마라.”
그 순간, 복부 깊은 곳에서 차가운 떨림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불편함, 즉 수치심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 감정을 억눌렀다. 이것은 개인의 윤리가 아닌 시스템의 논리라고 합리화했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곧 ‘유능함’이라는 조직의 보이지 않는 명령이었고, 나는 그 명령에 복종했다. 25년간 그런 감정들을 미숙한 방해물로 여기며 살았다. 감정을 억누를수록 더 유능한 직원이 되었고, 승진했으며, 인정받았다. 은퇴 후, 텅 빈 서재에 홀로 앉아서야 깨달았다. 그토록 피하려 했던 그 감정이, 어쩌면 나의 마지막 양심이었을지 모른다고.
2부. 도덕적 지각
크리스타 K. 토마슨의 『악마와 함께 춤을』은 이 억압된 감정의 윤리적 가치를 파고든다. 이 책은 우리가 장애물로 여겨온 수치심, 죄책감, 분노와 같은 ‘어두운 감정’들이 실은 도덕적 삶의 필수 요소라고 주장한다. 토마슨은 수치심을 단순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묻는 죄책감과 구별한다. 죄책감이 행동에 대한 것이라면, 수치심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그날 회의실에서 느꼈던 수치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내면의 이상과, ‘실제로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나’ 사이의 괴리. 토마슨의 관점에서 감정은 비합리적인 충동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도덕적 지각’의 한 형태다.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내 안의 도덕적 나침반이 ‘현재의 항로는 잘못되었다’라고 보내는 강력한 경고 신호라는 의미다. 회의실에서 느꼈던 그 불편함은 미숙함이 아니었다. 내 안의 나침반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 나침반을 25년간 무시했다.
3부. 춤이 멈춘 후
시스템의 명령에 따라 25년간 ‘악마와의 춤’을 계속했다. 춤이 멈춘 후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지만, 텅 빈 내면에는 그동안 억눌렀던 수치심의 메아리만 남았다. 은퇴 후 가장 괴로웠던 것은 무력감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선한 사람이 될 자격이 있는가’라는 내적 질문이었다.
『총, 균, 쇠』에서 개인의 조건(우연)을 인정하자 선택이 가능해졌다. 『지리의 힘』에서 국가의 조건(지리)을 인정하자 의지가 생겼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명의 조건(유전자)을 인정하자 자유로워졌다. 이제 8편에서 내게 묻는다. 감정의 조건인 수치심을 인정하면 무엇이 가능한가?
토마슨의 책은 죄책감으로 인한 자기 파괴 대신, 수치심을 통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 내가 잃어버렸던 것은 ‘유능함’이 아니라,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누구인가’를 대면할 용기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날 회의실에서 느꼈던 떨림은 시스템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나’의 흔적이었다. 그 떨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깊이 잠겨 있었을 뿐이다.
은퇴 후, 시스템의 명령이 사라지자 그 떨림이 다시 떠올랐다. 악마와의 춤은 끝났지만, 춤을 추던 동안 외면했던 나 자신과 이제 마주해야 했다.
4부. 수치심을 느낄 용기
토마슨은 말한다. “우리는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를 깨닫는다.” 성숙이란 불편한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성찰의 도구로 삼는 지혜다. 수치심은 피해야 할 독이 아니라, 내가 추구해야 할 도덕적 이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총, 균, 쇠』에서 우연을 인정하며 겸손을 배웠고, 『지리의 힘』에서 지리를 인정하며 의지를 얻었고,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를 인정하며 자유를 찾았다. 이제 『악마와 함께 춤을』에서 수치심을 인정하며 도덕적 나침반을 되찾는다.
15년 전 그 회의실에서 상무는 “감정적으로 굴지 마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야 보인다. 그날 내가 느낀 수치심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반응이었다는 것을. 시스템의 논리가 윤리를 압도할 때, 수치심은 나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 저항을 억눌렀지만,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은퇴 후, 그 저항이 다시 나를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진주에서 왔고, 한반도에 살며, 유전자 안에 있고, 수치심을 느낀다. 이 모든 것이 조건이다. 하지만 조건을 알기에, 선택할 수 있다.
우연을 알기에 겸손할 수 있고, 지리를 알기에 의지를 가질 수 있고, 유전자를 알기에 자유로울 수 있으며, 수치심을 알기에 도덕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나다. 수치심을 느낄 용기, 그것이 은퇴 후 내가 얻은 가장 귀한 자산이다.
7만 년 전, 사피엔스는 도덕을 상상했다. 15년 전, 나는 수치심을 억눌렀다. 그리고 오늘, 나는 수치심을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