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기울기 위에서
은퇴 후 첫 아침, 나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 출근할 곳도, 마감할 일도 없었다. 시간은 갑자기 너무 많아졌고, 나는 그 안에서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사람들은 은퇴를 '제2의 인생'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오래 걸어온 길의 끝에서 다시 자신을 마주하는 일에 가까웠다. 직함도, 명함도, 출근길도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지나간 시간을 기록하려 했다. 그러나 쓰다 보니 과거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문장을 고르는 과정은 삶을 다시 읽는 과정이었고, 단어를 선택하는 순간은 나 자신을 재정의하는 순간이었다.
이 책에 실린 15편의 글은, 은퇴 이후 내가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방식이었다. 존재의 무게를 느끼고, 관계의 온도를 재고, 세계를 응시하며, 시간의 기울기 위에 조용히 서 있는 법을 배웠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은퇴하고 뭐 하세요?" 나는 이제 이렇게 대답한다. "문장을 씁니다."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좋다. 그 문장 안에 내가 있고, 내가 본 세계가 있고, 내가 살아온 시간이 있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여백이다. 그 여백 위에서 나는 다시 문장을 시작했다. 이 책이 같은 시간을 건너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혹은 조용한 동행이 되기를 바란다.
당신의 삶에도, 아직 한 문장이 남아 있다.
2025년 가을
진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