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적인 만남

글이 가진 힘을 조금씩 알게 된 순간

by ㄱHMㅣ

Chapter 1.

작고 소심한 내가 세상과 연결되는 법



나는 또래 중 키가 제일 작았다. 작고 소심했다. 키가 작다는 이유로 맨날 앞자리에 섰다. 줄서기를 할 때도 맨 앞, 교회에서 율동할 때도 맨 앞, 처음 간 유치원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나는 1년 내내 맨 앞자리에 앉아야 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싫었다. 자꾸만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놀이터에선 큰 구조물 뒤로 몸을 숨겼고, 복도를 지나갈 때는 친구들 뒤에 숨어 다녔다. 그런 내가 다니는 유치원은 분기마다 학부모님들이 모인 강당에서 웅변 발표회를 해야 하는 곳이었다. 발표회 시즌이 되면 선생님은 짧은 글이 담긴 빳빳한 코팅 종이를 개개인에게 나눠주셨다. 그날부터 우리는 뜻도 모르는 원고를 달달 외워야 했다.


늦은 밤, 마트를 정리하고 온 엄마가 인쇄된 글을 또박또박 읽어주면, 나는 엄마의 목소리를 그대로 듣고 따라 말했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엔 글이 묘사하는 풍경이나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글이 의미하는 뜻을 알게 되니 외우는 데에도 빠르게 속도가 붙었다.


발표회가 점점 가까워지면 아빠는 은빛 캠코더를 집어 들어 웅변하는 내 모습을 화면에 담아 보여주셨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2000년대 최초의 모니터링이었다. 화면 속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이 사이로 새는 발음은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지만, 가족들의 칭찬과 응원은 끝내 나를 무대에 서게 했다.


“다음은 슬기반 김개미 어린이의 웅변 발표가 있겠습니다.”


하울링 섞인 마이크 소리와 함께 내 이름이 불렸다. 무대 뒤편에 앉아 여느 아이들처럼 코팅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우물쭈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100g도 안 되는 심장이 콩콩 뛰다가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무대 위로 올라간 나는 보조 선생님께서 마이크를 조정해 주시는 동안 눈을 굴려 부모님을 찾았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신기하게 엄마 아빠 얼굴은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마치 사진 속 주변 테두리를 어둡게 만드는 비네팅 효과를 걸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여전히 떨리고 두려운 순간이지만, 열심히 외운 문장을 줄줄 뱉어냈다.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이 작고 소심하기만 한 아이가 아닌, 대범한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들부터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갖자고 힘차게 부르짖습니다!”


양 주먹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는 동작은, 찰나의 순간으로 기록되어 유치원 졸업 앨범에 들어갔다. 터져 나오는 박수와 함성을 뒤로한 채 무대에서 내려가면, 잠시나마 세상 앞에서 목소리를 내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작고 소심하기만 했던 아이가 글을 통해 목소리를 찾게 된 것이다.


여전히 무대에 올라가는 건 두려웠지만, 그 후로도 나는 내심 웅변대회를 기다렸다. 시즌마다 선생님이 나눠주시는 웅변 원고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한 친구들의 웅변 발표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여러 가지 장면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어린 나는 몰랐겠지만, 아마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글이 가진 힘을 조금씩 알게 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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