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천재 뮤지션'

유재하를 추억하며..

by JIPPIL HAN

1987년이 저물어가던 12월의 어느 금요일 밤,
‘별이 빛나는 밤에’의 클로징 멘트가 끝나자 마지막 곡이 흘러나왔다.


“오늘 마지막 곡은 유재하가 부릅니다. ‘지난날’.”


그날이 처음으로 ‘가수 유재하’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이었다.

노래는 기존 발라드와는 많이 달랐다.

클래식 같기도 하고, 재즈 같기도 하며, 섬세한 감수성이 깃든 낯설지만 묘하게 끌리는 음악이었다.


어떤 가수인지 너무 궁금했지만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바로 알 방법이 없었다.

주말이 되자마자 레코드점을 찾아가 유재하의 음반을 찾았으나, 이미 LP는 모두 품절이었다.

남아 있는 몇 장의 테이프 중 한 장을 얼른 집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카세트에 넣고 1)*오토리버스 기능을 켠 채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며칠을 꼬박 들었다.

앨범에 실린 모든 곡들이 하나같이 주옥같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모든 곡을 스스로 작사·작곡한 ‘싱어송라이터’였다는 사실이다.


노래를 다 듣고 난 나는 순식간에 유재하의 팬이 되어버렸다. 아니 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을 참지 못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유재하 알아? 노래가 어쩜 이렇게 다 좋아?”


그러자 친구는 놀라는 듯 말했다.
“너 혹시 모르는 거야? 유재하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 떠났잖아.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됐는데…”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음악의 세계에 설레어 있던 나는 친구의 말을 듣고 한순간에 그 설렘을 모두 빼앗겨버렸다.

바로 그때 갑자기 두 눈에서는 알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야 너 울어? 뭘 울기까지 해? 아는 오빠도 아닌데” 라며 친구는 웃었지만,

그때의 내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앞으로 그의 새로운 노래를 더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저 너무 서글펐다.


신문을 뒤져 확인해 보니 사고 소식은 사실이었다.

1987년 11월 1일 새벽, 홍제동 근처에서 차량이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사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는 기사. 나이 스물다섯.


나는 노래들이 가수를 따라 어디로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쉼 없이 그의 노래를 들으며 내 머리와 가슴 속에 저장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내 마음을 흔들어놓더니, 이내 전설로 떠나버린 천재 뮤지션 '유재하'.

유재하의 음악은 지금도 전혀 낡지 않았다. 빛바래지도 않았다.


그의 곡에는 기존 가요에서 찾기 힘든 새로운 언어가 있었다.


단순한 3도 화음 진행이 아닌, 재즈와 클래식 화성을 섞어낸 조화로움.

건반 중심의 단순한 편곡이 주류였던 시대에 직접 현악과 관악을 활용한 오케스트레이션.

귀에 쉽게 감기는 반복형 멜로디가 아닌, 한 음 한 음이 마치 가곡처럼 흘러가는 선율.

단순한 연애담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회한, 순수한 동경을 담아낸 시적인 가사.

그리고 기교보다 진정성으로 다가오는 담백한 목소리.


그래서인지 37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가 않다.

지금의 정서에도 백 프로 통하는 세련된 음악이다.


만약 그가 그때,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않고 지금도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한국 가요계의 흐름은 훨씬 더 빨리 바뀌었을 것이다.

김동률, 유희열, 루시드폴 같은 싱어송라이터 후배들이 10년은 앞서 무대에 섰을지도 모른다.


음악적 실험은 더욱 풍성해졌을 것이고, 지금의 K-팝 완성도는 훨씬 일찍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조용필이나 이문세 못지않은 거장이 되어 후배들을 이끄는 프로듀서로서 한국의 가요계의 큰 축이 되었을 것이다. SM, JYP와 함께 'YJH'라는 이름의 거대한 프로덕션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오늘 천재 뮤지션 유재하를 추억하며,

문득 내가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노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듣고 싶어 진다.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 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거짓인 줄 알면서도 겉으론 감추며 한숨 섞인 말 한마디에 나만의 진실 담겨 있는 듯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가리...."


아래를 누르시면 유재하의 생전 '젊음의 행진'에 출연했던 영상 보실 수 있습니다.

저도 유재하 님의 생전 노래영상은 처음 봅니다.

꼭 들어보시고 그 시절 추억에 젖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VlY18 JiWbyo



1)*오토리버스(autoreverse) 기능은 1980년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에서 등장한 획기적인 기능으로

카세트테이프의 A면과 B면을 자동으로 뒤집어 재생해 주는 기능.

원래는 A면이 끝나면 사용자가 직접 테이프를 꺼내 뒤집어야 했는데, 오토리버스가 탑재된 기기는 헤드가

자동으로 방향을 바꾸거나 테이프 릴 자체가 역회전하면서 연속 재생이 가능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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