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이성. 믿음. 위로. 네 얼굴의 사랑
오늘은 방향을 조금 틀어보려 합니다.
1~8화까지는 에세이로 썼지만, 이번 9화는 동화로 풀어낸 기질 이야기입니다.
히포크라테스의 4 기질 ― 열정, 이성, 믿음, 위로.
그 기질들이 성 안의 네 기사로 등장해, 사랑의 파편을 찾아 떠납니다.
히포크라테스의 4 기질은
고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가 사람의 성격을
네 가지로 나눈 오래된 분류입니다.
다혈질 : 불처럼 열정적이고 추진력이 강한 기질
담즙질 : 깊이 생각하고 진지하며 이성적인 기질
점액질 : 차분하고 신뢰를 주는 믿음의 기질
우울질 : 따뜻하고 감성적이며 위로를 건네는 기질
이번 동화 속 네 기사는
바로 이 기질들을 의인화해 등장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기존 에세이
2화, 3화, 5화에서 다루었으니 함께 읽어보셔도 좋아요.
조금 낯설더라도, 익숙한 에세이에서 잠시 벗어나
창작동화라는 낯선 길을 함께 걸어주실래요?
여러분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장면을 찾아보세요.
성 밖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살았다. 짭짤한 국물은 시장의 소문을 품고 흘렀고, 고소한 빵들은 구운 살결로 아침을 깨웠다. 달큼한 과일들은 낮잠을 보태고, 국수는 저녁을 길게 늘여 앉혔다.
그러나 성 안에는 단 네 음식만이 있었다. 그들은 기사라 불렸다.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성의 심장,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랑의 파편을 지키는 수호자들.
붉은 고추는 열정의 기사였다. 뜨거운 결심이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을 데어 떠나게 했다는 기억을 품고 있었다.
깊은 커피는 이성의 기사였다. 차갑게 내린 결정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날을, 매일 아침 첫 향으로 떠올렸다.
밥은 믿음의 기사였다. 오래 쌓은 신뢰가 한 번에 무너지는 순간을, 말없이 삼켜낸 적이 있었다.
초콜릿은 위로의 기사였다. 사랑받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못한 채 겨울을 났던 소년·소녀의 시간을, 몸속 가장 은은한 단맛으로 감췄다.
그들은 성의 중앙에 놓인 사랑의 파편을 지켰다.
파편은 맑고 단단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이 있었다. 누군가의 이별, 누군가의 기다림, 누군가의 용서.
그 결이 모여 파편은 빛났다.
빛은 성의 식탁을 밝혔고,
그 식탁에서 사람들은 하루를 버텼다.
어느 날, 파편이 사라졌다.
자취도, 긁힌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남은 건, 파편이 놓였던 자리 위에 도톰하게 접힌
작은 지도 한 장.
지도에는 점 하나가 깜박이며 떠 있었다. 별처럼 깜박이는 그 점은 파편의 위치를 알려주는 듯 보였다.
고추가 손가락으로 그 점을 가리키는 순간, 점이 찰나 더 밝아졌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의 말에 날을 세우자, 점은 희미해졌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밝아졌다가 흐려졌다.
"다투면 멀어진다." 밥이 조용히 말했다.
"믿으면, 가까워진다." 커피가 낮게 덧붙였다.
그들은 늦은 밤, 성의 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첫째 날, 들판의 바람이 매웠다. 고추가 앞섰다
"사랑은 불처럼 타올라야 해. 꺼지면 끝이야."
커피가 고개를 저었다.
“불만 믿으면 타버려. 사랑엔 온도가 필요해."
그들의 말씨가 급히 달아오르자, 지도 위의 점이 한숨 쉬듯 흐릿해졌다.
길이 길어질수록 음식들은 제 빛을 잃었다.
커피의 향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고추의 매운맛은 물처럼 옅어졌다. 초콜릿은 손등에 녹아 끈적였고, 밥은 바람만 스쳐도 부서질 만큼 푸석해졌다.
초저녁, 그들은 길가의 돌무더기에 기대앉아 숨을 골랐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오래된 시간만이 소리를 냈다.
고추의 기억이 먼저 흘렀다.
그는 한때 자신과 같은 붉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사랑했다. 함께 있을 때 둘은 더 뜨거웠고, 세상은 그 뜨거움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불은 늘 조명이 되지 않았다. 어떤 밤엔 소음이었고, 어떤 날엔 화재였다. 사랑을 지키려던 열정이 상대를 태워버렸다는 걸, 그는 너무 뒤늦게 알았다.
"미안하다는 말엔 타이밍이 있어."
고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커피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반대였어. 올바른 결정을 하면 사랑은 따라올 줄 알았지. 그날, 나는 식탁 끝에 앉아 '지금은 내 말대로만 하는 게 맞다'라고 말했어. 나는 옳은 말을 했고, 우리는 틀어졌지."
커피는 웃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바른 선택이 따뜻한 선택과 같은 날이 올까, 가끔 생각해."
밥이 손에 쥔 조그만 부스러기를 모아 다시 쌓았다.
"나는 믿었어. 오래, 오래. 같이 같은 밥을 먹으면 같은 마음이 된다고.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다른 식탁에서 다른 사람과 같은 반찬을 나누더라."
밥은 더 말하지 않았다. 말없이 쌓는 게 그의 버릇이었으니까.
초콜릿은 해가 지고서야 입을 열었다.
"나는.... 받는 법을 몰라. 늘 주는 흉내만 냈어. 달콤한 위로처럼 보이길 바랐거든. 늘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늘 외로웠어. ‘나도 좀 안아줘'라는 말을 못 했어."
그의 목소리 끝에 작은 설탕 알갱이처럼 떨림이 붙었다.
그들이 각자의 상처를 꺼내 놓자,
지도 위의 점이 다시 숨을 들이켰다.
떨리던 빛이 둥글게 차올랐다.
"다투면 멀어지고, 나누면 가까워진다." 밥이 중얼거렸다.
그날 밤, 지도 위의 점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둘째 날, 점이 가리킨 곳은 강을 건너 숲을 지나 작은 마을의 광장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소박한 축제를 열고 있었고, 한가운데 길게 놓인 식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웃었다.
아무도 화려한 요리에 환호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맛, 누군가의 자리, 누군가의 옆모습에 환호했다.
고추가 식탁 가장자리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와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던 날, 그들도 이런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때 더 크게 웃고, 더 천천히 말했어야 했다.
커피는 식탁 둘레를 돌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컵들이 사람들의 손에 있었고, 그는 알았다.
온도란 이렇게 맞춰가는 것이라고. 한 사람의 씁쓸함이 다른 사람의 단맛과 섞여 새 풍미가 되는 걸, 처음으로 눈으로 보았다.
밥은 아이 옆에 앉아 숟가락질을 천천히 기다려주었다. 같은 반찬을 나누면서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모습을 보고, 오래전에 잃어버린 장면이 돌아왔다.
배신은 한 사람의 일이었지만, 믿음의 회복은 여러 사람의 손으로 이뤄졌다.
초콜릿은 조용히 노인을 안았다. “고맙다”는 말이 노인의 주머니에서 나오자, 그는 비로소 받는 법을 배웠다.
그 순간, 그의 달콤함은 끈적임이 아니라 온기가 됐다.
저녁 무렵, 지도는 다시 한번 밝아졌다.
점은 성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으로 돌아가자. 우리들의 집으로. “ 커피가 말했다.
그들은 길을 재촉했다. 걸음은 가벼웠다.
무거운 건 뒤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아니면, 무거움이 무게를 바꾼 걸지도 몰랐다.
성의 문을 통과하자, 식탁 위에 파편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영롱했다.
빛은 얇고 길게 뻗어 성의 벽과 천장을 부드럽게 쓸었다.
"돌아왔구나." 밥이 가장 먼저 말했다.
고추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파편에 닿으려는 순간, 파편이 깨질 듯 떨더니, 조용히, 그러나 거대한 숨을 내쉬듯 산산이 흩어졌다.
빛의 조각들이 공중에서 잠깐 멈춰, 네 기사의 가슴을 통과했다. 그리고 창을 빠져나가 성 밖의 마을로, 들판으로, 도시로, 또 어떤 외로운 방으로 흩어져 갔다.
그들이 놀라 가슴을 움켜쥐었을 때,
그 안에서 따끈한 것이 뛰었다.
고추의 불은 부드러워졌고,
커피의 향은 깊이를 하나 더 얻었다.
초콜릿의 달콤함은 입천장에 들러붙지 않았고,
밥의 알갱이는 서로의 어깨에 기댄 듯 탄탄했다.
"끝난 걸까?" 초콜릿이 물었다.
"아니." 커피가 미소 지었다. "이제 시작이지."
그날 밤, 성의 식탁에서 그들은 잠들지 못했다.
대신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이 그들을 데려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빛의 조각을 품은 이들에게는
시간이 한 번쯤 되돌아갈 권리가 주어졌다.
고추의 꿈부터.
그는 오랜 전, 한 식탁의 맞은편에 다시 앉아 있었다. 불처럼 웃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그날과 같은 반찬, 그날과 같은 조명. 다른 것은 단 한 가지, 그의 목소리였다.
"나는 네가 다치지 않길 원해."
그는 불을 내지 않았다. 불씨를 건넸다.
손바닥 위 작은 온기를 그녀의 손으로 옮겼다.
사랑이 타오르기보다 따뜻해지는 법을 그제야 배웠다.
그가 손을 잡자,
상대의 눈동자에 작은 불빛이 고요히 떠올랐다.
그 장면이 그의 가슴속으로 깊게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커피의 꿈은 새벽이었다.
그가 돌아가지 못했던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래전, 그는 '맞는' 선택을 말했고, 그 말은 문이 되어 닫혔다. 이번엔 컵을 먼저 내밀었다.
"틀릴지도 모르지만, 네가 괜찮다면 같이 마실래?"
사람들은 놀랐다가 웃었다. 온도는 말로 조절하는 게 아니라, 나눠 마시며 맞춘다는 걸 그는 늦게 배웠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씁쓸함이 먼저 입을 데우고,
뒤이어 단맛이 혀를 감싸자, 서로의 얼굴이 천천히 풀렸다.
옳은 것과 따뜻한 것이 같은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날 비로소 증명되었다.
밥의 꿈은 낮이었다.
그는 오래된 친구 앞에 앉아 있었다. ‘왜 그랬어’로 시작하면 모든 것이 부서질 것을 알았다. 그는 밥그릇을 가운데 놓고 말했다.
"나는 네가 좋았어. 많이."
친구가 울었다.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밥은 울지 않았다. 대신 수저를 건넸다. "그럼, 같이 먹자."
배신은 혼자 저지른 일이었지만, 회복은 둘이서 했다. 숟가락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화해의 악수가 되었다.
초콜릿의 꿈은 겨울이었다.
그는 낡은 창틀 아래에서 어린 자신을 보았다.
작은 손이 주머니 속에서 굳어 있었다.
초콜릿은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높이에 맞췄다.
"사실... 나도 많이 외로웠어."
그 말이 입에서 나오자, 아이가 초콜릿 한 조각을 깨물었다. 단맛이 아이의 눈가에 반짝임으로 번졌다.
"이제 나는, 받기도 할 거야. 그리고 줄 거야. 둘 다. 함께 용기 내어 보자. “
눈발이 그치자, 그들의 어깨 위에 가볍게 녹은 설탕가루가 햇빛처럼 반짝였다.
꿈이 끝나고, 그들은 같은 식탁에서 눈을 떴다.
창밖은 새벽이었다. 파편은 더 이상 한 점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성의 돌벽 사이사이, 주방의 나무도마 결 사이, 식탁보의 실 사이에 작은 빛들이 박혀 있었다.
"흩어진 게 아니라, 퍼진 거네."
밥이 말했다.
"그래서 지켜야 할 건 점이 아니라, 자리인 거지."
커피가 덧붙였다.
"누구와 앉느냐, 어떻게 앉느냐."
고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끝나고도 서로를 안아줄 수 있느냐."
초콜릿이 미소 지었다.
그날 이후, 성 밖의 음식들은 자주 성 안으로 초대되었다.
그들은 각자의 맛을 들고 와 서로의 삶에 섞였다.
누군가는 식탁 위에 눈물을 살짝 뿌렸고,
누군가는 웃음을 올렸다.
파편의 빛은 한 곳에 모이지 않았다.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네 기사는 더 이상 하나의 보석을 지키지 않았다.
대신, 식탁을 지켰다.
자리를 비워두고, 자리를 채우고,
때로는 자리를 바꿔주었다.
불은 과하지 않게,
온도는 너무 차갑지 않게,
달콤함은 들러붙지 않게,
알맹이는 서로 기대도록.
어떤 날,
성 밖의 소년이 길을 잃고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배가 고프냐는 물음에,
그는 배보다 마음이 고프다고 대답했다.
고추가 수저를 건네고,
커피가 잔을 올리고,
밥이 그릇을 앞으로 밀었고,
초콜릿이 작은 조각을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소년이 한 모금, 한 숟가락, 한 조각을 입에 넣을 때마다,
성의 벽돌 사이에서 작은 빛들이 픽, 픽 하고 켜졌다.
소년은 잠깐 멈추고 말했다.
"이건… 어디서 온 걸까요?"
커피가 대답했다.
“너와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는 데서."
밥이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내일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에서."
초콜릿은 미소만 지었다.
고추는 가만히, 수저를 더 얹었다.
밤이 깊어지고, 성의 식탁에는 천천히 여백이 생겼다.
누구는 먼저 일어났고, 누구는 남아 설거지를 거들었다.
네 기사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정리했다.
비워진 그릇 안쪽에서 희미하게 빛이 돌았다.
그들은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사랑은 오늘의 자리에서 충분했다.
내일의 사랑은 내일의 자리에서 다시 차려질 것이다.
성 밖의 도시, 들판, 좁은 방, 분주한 부엌, 외로운 카페, 늦게 끝난 회의실, 낡은 기숙사의 계단 끝. 파편의 빛은 그 모든 곳으로 가 있었다.
사랑은 그날 밤, 누구의 것이 아니었고 모두의 것이었다.
한 점의 보석이 아니고, 매 끼니마다 새로 차려지는 언어였다.
네 기사는 성의 식탁 끝에 나란히 앉았다.
고추가 먼저 불씨를 가만히 불어 살렸다.
커피가 온도를 맞췄다.
밥이 그릇을 정중앙에 놓았다.
초콜릿이 마지막으로 작은 조각 하나를, 누구라도 집어갈 수 있게 가장자리로 밀어 놓았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같은 것을 먹었다.
같은 것을 먹으니, 같은 마음이 조금 생겼다.
꼭 같지 않아도, 충분히 닮았다.
창밖에 새벽이 더 옅어졌다.
누군가가 성문을 두드렸다.
오늘의 자리가 또 열렸다.
그리고 사랑의 파편은 다시 한번, 흩어졌다가 모였다.
흩어짐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었다.
이번 9화, '음식은 나를 지탱하는 또 다른 언어'는 조금 낯설었을 수도 있지만,
끝까지 함께해 주신 걸 마음 깊이 감사드려요.
이번 동화를 읽으며, 당신은 네 기사 중
**어떤 모습에 가장 마음이 머물렀나요?**
혹은, 당신의 식탁 위에는
**어떤 사랑의 파편이 놓여 있다고 느끼시나요?**
다음 화에서는 《작은 식탁 위의 성찰》,
다시 우리의 일상 자리에서 마주한 깨달음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