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는 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봄비 내리는 오후,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울려 퍼지는 빗소리에 젖어들었다. 수원화성 화홍문에 도착했을 때, 봄꽃이 만개한 나무들 사이로 빗방울은 그칠 기미 없이 쉴 새 없이 내려앉았다. 마치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 끊임없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차에서 내려 잠시 고민에 빠졌다. 비 오는 날의 산책은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일이지만,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엔 아무래도 불편할 터였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카페로 피신할까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결국 빗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촉촉이 젖은 고요한 풍경을 렌즈에 담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오늘 날씨와 유난히 잘 어우러지는 벚꽃 무늬 우산을 펼쳐 들었다. 오늘의 출사지는 바로, 봄비 내리는 수원화성 성곽길이었다.
성곽을 따라 흐르는 빗물은 돌 틈마다 부지런히 안부를 묻는 듯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이 봄비는 시간이 멈춘 듯,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감정들을 조용히 꺼내 놓았다. 빗속에서 천천히 스며들며, 발걸음마다 차분한 정적 속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리움에 젖어 들었다.
수백 년을 견뎌온 성곽 위로 흘러내리는 빗방울은 그 자체로 시간의 흐름과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벚꽃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마저 마음을 위로하는 듯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문득 정조의 마음을 떠올렸다. 수원화성을 세우며 수없이 이 길을 걸었을 정조의 발걸음을 상상했다. 재위 기간 중 열여덟 번이나 화성 행차를 했다는데, 나는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성곽길을 오르내리며 천천히 걸어보았다.
정조의 마음을 따라 걷다
수원화성은 돌과 흙으로 쌓아 올린 성벽이지만, 그 안에는 한 시대의 꿈과 의지가 겹겹이 서려 있다. 정조가 바라본 새로운 세상을 담아낸 곳이자, 한양을 넘어 조선의 미래를 설계하려 했던 치열한 고민이 깃든 공간이다. 군사적 요새라는 역할을 넘어, 정치와 권력의 무게를 새롭게 짊어지며 변화를 꿈꾸던 정조의 의지가 이곳에 단단히 뿌리내렸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통해 수많은 꿈과 희망, 그리고 그리움을 담아냈다. 그중에서도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사랑은 그의 마음속에서 특별했다. 수원화성은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 안에 담긴 인간적인 감정, 그리움의 깊이가 나를 더욱 강하게 이끌었다. 성곽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정조가 느꼈을 외로움과 고독,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하나하나 가슴에 와 닿았다. 그가 걸었던 이 길 위에서 나는 그와 함께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복잡한 감정, 홀로 남은 어머니와의 추억, 백성을 향한 책임감… 이 모든 감정이 이 길 곳곳에 스며 있는 듯했다.
내 안의 그리움, 정조의 그리움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성곽길에서 나는 내 안에 숨겨진 그리움을 마주했다. 정조가 품었던 그것은 단지 왕으로서의 감정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었다. 정조에게 혜경궁 홍씨가 그랬듯, 나에게도 어머니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대학생 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엄마. 엄마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며 응원해주던 믿음직스러운 기둥이었다. 세상과 맞서 싸울 용기를 주던 유일한 존재였다. 봄비 내리는 성곽길을 걷다가 문득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를 향한 마음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내 마음에 젖어 들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혹은 어머니를 마음에 담고 이 길을 걸었을 때의 감정은, 아마도 지금 나의 감정과 닮아 있었을 것이다. 사랑과 상실, 그리움이 묻어나는 성곽길 위에서, 나는 엄마와 함께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빗속에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성곽길은 끝도 없이 이어진 부드러운 흙길이었다. 빗속을 걷는 일이 이렇게 평온하고 단단하게 느껴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흙길은 생각만큼 미끄럽지 않았고, 신발에 진흙 하나 묻지 않았다.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이 기도로 이 길을 걸으며 다져왔기 때문이리라. 애절한 걸음마다 기도가 되고 소망이 되어 흙길을 단단하게 다져왔을 것이다. 그리움의 기도로 단단히 얽힌 보이지 않는 발자국들이 오늘의 나를 이 길로 이끌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걸었다. 과거와 현재, 왕과 백성, 그리고 나와 엄마. 모든 감정과 이야기가 이 길 위에서 하나가 되는 듯했다.
마무리
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는 동안, 나는 정조의 마음과 나의 감정이 교차하는 특별한 순간을 맞이했다. 어머니를 향한 그의 깊은 애틋함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는 감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수원화성은 단순한 문화유산을 넘어, 오랜 세월을 건너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의 결'까지 담아낼 수 있는 장소로 기억되리라. 비는 저녁이 될수록 더욱 굵어졌고, 성곽은 고요하게 정조의 사무치는 애정을 품듯 그 비를 받아주었다. 그 비는 오래된 역사와 추억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감성의 마중물이었다. 잿빛 하늘 아래, 오랜 시간 동안 지켜온 성곽길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나를 품었다. 그 길 위에 선 나는 시간과 기억, 사랑과 아픔을 안고 걸었다. 봄비에 젖은 성곽길 위에, 정조의 발자취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함께 남았다.
이 길은 이제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내 안의 감정과 이야기가 조용히 흐르는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간절함, 사랑, 기도, 상실 — 모든 것이 이 길을 따라 차분하게 녹아 들어갔다. 이제 이 길은 단지 성곽길이 아니다. 나에게 엄마의 온기를 다시 느끼게 해주는 감정의 오솔길이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마음을 잇는 따뜻한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