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서원에서 지관서가까지 여주 괴테마을
마음이 천천히 정리되는 여주 산책 코스 with 전영애교수
여백서원에 닿는 순간,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여백서원 — 숨이 한 번 더 깊어지는 곳
여백서원의 마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
먼 길을 달려온 마음이 먼저 멈추어 선다.
숨을 들이켜기도 전에,
공기 속에 머금어진 고요가 먼저 나를 감싼다.
햇살은 나뭇잎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살며시 비늘처럼 흩어지며 떨어지고,
그 빛의 조각들이 작은 길을 만들어
내 발끝을 은은하게 이끈다.
한옥 처마 아래 걸린 그림자들은
바람 한 줄에도 가볍게 흔들리며
오래된 이야기의 페이지를 넘기듯
소리를 내지 않고 속삭인다.
멀리서 들리는 물소리는
누군가 아주 조용히 딱 한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붓끝의 여운처럼 흐르고,
그 소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 닿을 때,
내 안의 오래된 아픔과 분주함까지
잠시 휴식의 자리를 얻는다.
그늘과 햇살이 번갈아 어깨에 내려앉고,
비질해 둔 마당의 결이 발바닥에 느껴질 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공간에 절반쯤 스며들어 있다.
시간은 천천히 식어가는 차처럼 고요해지고,
복잡했던 생각들은 자연스레 바람결에 흩어진다.
어딘가에서 은근히 풍겨오는 나무의 향,
낮은 담을 넘는 새소리,
그리고 한옥이 품고 있는 오랜 세월의 숨결은
조용한 이야기 속으로 천천히 데려가
거창하지 않은 위로로 나를 안아준다.
‘아, 나는 지금 비로소 쉬러 왔구나’
그 사실을 늦게서야 깨닫는다.
마당 깊숙이 들어설수록
빼곡했던 마음의 페이지 사이로
여백이 조금씩 생겨나는 듯하고,
그 여백이야말로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쉼의 모습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이 평온은 혼자였더라면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오늘 이 여백의 풍경이 더 고운 이유는..
좋은 친구들과 함께여서, 마음까지 더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여백서원에서 지관서가로 향하는 발걸음
서원을 지나 들판으로 — 고요가 넓어지는 길
서원을 나서 지관서가까지 걷는 길은
조용한 산책길처럼 부드럽게 이어진다.
들풀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흙냄새에 묻어난 햇살이
한 걸음마다 작은 이야기처럼 따라온다.
길을 걸으며 나는,
늘 바쁘게 앞만 보던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의 버튼이
살며시 눌리는 순간이었다.
서원을 지나 마을길로 접어들면
풍경의 결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몰입의 기운이 흐르던 한옥의 고요는
들판의 넓은 숨에 길을 내어주고,
바람은 한층 느슨해진 호흡으로
내 어깨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추수가 끝난 논 위로
맑은 하늘이 미끄러지듯 내려와
들판 전체가 한 페이지의 오래된 거울처럼 빛난다.
그 앞에 서 있는 동안
내 안의 소란도 함께 가라앉는다.
감정의 먼지가 서서히 내려앉고,
조용한 빈자리 안에
새로운 숨이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
마치 자연이 한 페이지씩 넘겨주는 책 속을 걷는 듯했다
하늘은 그날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침묵으로 말을 건네는 지관서가
들판을 지나 지관서가에 다다르면
지붕 끝에서 내려오는 깊은 그늘이
부드럽고 단단하게 나를 감싸준다.
지관서가는 말수가 적은 공간이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은근히 흘러나온다.
노란빛 벽지 너머 괴테의 문장이 조용히 떠다니고,
그의 서재에 배어 있던 엄격한 훈육과 따뜻한 사유,
그리고 괴테 아버지가 즐겨 모았다는
두툼한 법학 책 더미까지
이 집의 공기 속에 고요하게 스며 있다.
“좋은 시절에 소망한 것은
노년에 풍성하게 이루어진다.”
(오래 품은 마음은 결국 형태를 갖춘다는 이야기.)
괴테의 말은
지관서가의 침묵 위에 살짝 얹혀
마치 오래된 약속처럼 들렸다.
“나무들은 하늘까지 자라지는 않도록 되어 있다.”
(모든 것에는 자연의 한계와 균형이 있음을 일깨우는 문장.)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있는 능력의 예감이다.”
(꿈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사실.)
그 문장은
내 안의 가능성을 살며시 흔드는 바람 같았다.
이곳에서 나는
말없는 장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지관서가는
멈추는 법을 잊고 달려온 사람에게
다시 멈추는 법을 가르쳐주는
작고 단단한 서재 같은 집이다.
하루 끝에 문득 깨닫는 것들
지관서가의 벤치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바람은 계속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빛은 여전히 나뭇잎 사이에서 반짝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순간이
오히려 마음을 채워 넣는다.
여주의 고요한 하루는
결국 나를 다시 나에게 데려다 놓는다.
괴테 오솔길 산책은 풍경을 바라보는 길이 아니라
나에게 천천히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걸음을 늦추면 마음이 보이고,
고요를 들으면 문장이 들린다.
비워지고, 채워지고,
다시 고요히 깊어지는 하루.
오늘의 여주는
언제든 다시 펼쳐 읽을 수 있는
조용하고 단단한 문장 한 줄이 되었다.
그리고 문득,
오늘 이 길을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함께 걸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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