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우물에서 듣는 영혼의 메아리
부암동 소나타, 닫힌 우물
햇살, 길을 트다
햇살이 춤추듯 내려앉는 오후, 여전히 겨울의 냉기를 품고 있는 대지 위를 가로질러 성급한 하늘 틈으로 황금빛 햇살이 조용히 미끄러져 든다. 아련한 봄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길목에서, 나는 그 햇살의 고운 꼬리를 눈으로 더듬어 밟아본다. 인왕산 자락, 고요한 숨을 쉬는 부암동 길을 걷는 발걸음마다 오래된 사연들이 속삭이는 듯하다. 햇살은 시인의 언덕을 넘어서 나지막한 돌계단을 마치 아이처럼 내달리더니, 이내 윤동주 문학관의 닫힌 우물 속으로 설핏 숨어버린다.
앞서 걷는 이들의 배낭 틈새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마치 꽃잎처럼 향기롭다. 숨바꼭질하듯 사라진 햇살을 찾아 나도 윤동주 문학관의 문을 조심스레 연다.
제1전시실: 시인채에서 마주한 흔적
순결한 시심을 상징하는 듯 순백의 공간, 제1전시실 '시인채'에 들어서자 아홉 개의 전시대가 나를 맞이한다. 해설에 귀 기울이는 무리의 온기 뒤편으로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유리 너머 빛바랜 사진 속 젊은 시인의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한다. 그의 짧은 생애를 따라 흐르는 시간의 흔적들, 그리고 단정한 글씨로 채워진 친필 원고 영인본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소망했던 그의 간절한 숨결을 느끼는 듯했다. 한가운데 놓인, 그의 고향 우물에서 가져왔다는 우물 목판을 보며 그의 시 '자화상'이 떠올라 가슴 한편이 아릿해진다.
제2전시실: 열린 우물, 하늘을 담다
이윽고 왼쪽 문을 밀고 나서니, 사방이 굳건히 막힌 채 푸른 하늘만이 뻥 뚫린 **제2전시실, '열린 우물'**이 쨍한 빛을 쏟아낸다. 이곳은 고요히 침잠한 제3전시실, **'닫힌 우물'**로 향하는 길이기도 하다. 회색빛 벽과 왼쪽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딘다. 그 길은 마치 기억의 심연으로 이끄는 듯, 'ㄱ'자를 45도 기울여놓은 듯한 야트막한 내리막이다.
발을 디딜 때마다 온몸이 물속에서 걷는 듯 둔중해지며, 걸음마다 축축한 그리움이 배어나는 듯하다. 발을 바꿀 때마다 울림은 더욱 커져, 내 안의 고요한 메아리가 된다. 문득, 멀고 먼 후쿠오카 교도소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이토록 무거웠을까 하는 아린 상념에 잠긴다.
제3전시실: 닫힌 우물, 시인의 영혼과 만나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중략)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 윤동주 시 "자화상" 중에서
마침내 다다른 제3전시실, '닫힌 우물'. 통째로 안기는 하늘에서 숨어든 햇살을 찾아 헤매다, 작은 구멍처럼 보이는 좁은 입구를 찾아든다. 어둠이 먼저 내려앉은 우물 안으로 한 계단 내려디딘 채 잠시 뒤를 돌아본다. 숨 고르기를 마치고 들어선 우물 안에는 학창시절 과학실에서나 보았을 법한, 세월의 흔적이 깃든 동그란 나무 의자 열세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이곳에, 소년 윤동주가 고독한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듯하다. 나는 햇살이 조심스레 내리비치는 첫 번째 줄 오른쪽 끝 의자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더듬어본다. 교도소 창문 크기쯤 될까. 한 줌 햇살이 겨우 스며드는 작은 틈으로 설핏 보이는 하늘 조각을 바라본다.
나는 윤동주 시인이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염원했던 그 간절한 마음이 바로 이곳, 닫힌 우물 속에서 가장 투명하게 빛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순결한 영혼은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 이 우물의 깊이와 맞닿아 있었고, 나 또한 그 안에서 나 자신의 가장 솔직한 내면을 마주하는 듯했다. 이 닫힌 우물 속에서, 나는 비로소 윤동주 시인의 마음 깊이 숨어든 희망의 햇살과 마주할 수 있었다.
청운의 길, 나의 별 헤는 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 윤동주 시 '별 헤는 밤' 중에서
토요일 오후 두 시를 훌쩍 넘긴 청운 공원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부산하다. 한양 도성 순성 길을 걷는 발걸음들이 겹겹이 쌓인 겨울의 흔적을 부지런히 밀어낸다. 봄기운을 머금은 인왕산 아랫길은 골목마다 싱그러운 이야기꽃이 피어오른다. 햇살이 잠시 빠져나갔던 시인의 언덕으로 다시 오른다. 아직 찬 기운이 흙길에서 올라오지만, 걷는 숨은 가쁘다. 하지만 가슴 가득 햇살을 안고 걷는 길은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게 할 만큼 따뜻하고 충만했다.
오늘 밤에는, 나도 윤동주 시인처럼 어둠을 뚫고 빛나는 별들을 마음에 새기러 나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