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시간 속에서 생각을 찾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문턱을 넘을 즈음이면
이상하게도 만년필의 질감이 그리워진다.
손끝의 묵직함, 사각거리는 소리, 그리고 번지는 잉크의 미세한 흔적들.
한동안 만년필을 잊고 지냈다.
손끝의 잉크 냄새보다 스마트폰 자판의 속도를 더 신뢰하는 시절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빠르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잊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된 노트를 정리하다가
군 시절 쓰던 검은 만년필 하나가 손에 잡혔다.
그 촉감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마치 잊고 있던 나 자신이 그 안에 숨어 있는 듯했다.
조심스레 잉크를 채우고 종이에 첫 줄을 써 내려갔다.
그 순간, 내 생각도 함께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생각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만년필로 글을 쓰면 문장마다 ‘멈춤’이 생긴다.
그 멈춤이 내면의 소리를 정리하고, 감정의 결을 다듬는다.
MBA 시절, 수많은 전략 프레임워크를 배우며 느꼈다.
진짜 전략은 ‘빠른 판단’이 아니라 ‘깊은 이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만년필의 느린 흐름은 그 이해를 돕는 도구였다.
생각을 적어보지 않으면, 그것이 진짜 내 생각인지 알 수 없다.
디지털 문서가 ‘정보’를 남긴다면,
만년필은 ‘사유’를 남긴다.
지금도 중요한 결정을 앞두면 나는 노트를 펼친다.
회의실의 수많은 의견보다, 그 위에 남은 몇 줄의 잉크 자국이 나를 더 설득한다.
그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내가 나와 마주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교수는 은퇴를 앞두고
자신이 평생 사용하던 만년필을 제자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펜으로 수많은 생각을 썼지만,
이제는 자네가 써야 할 차례일세.”
그 이야기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기록이란 결국 사유의 계승이고,
만년필은 그 바통을 잇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잉크가 마르면 다시 채우면 된다.
리더십도, 전략도, 삶의 방향도 그렇다.
멈추고, 채우고, 다시 이어가는 것... 그것이 삶의 리듬이다.
오늘도 나는 잉크를 다시 채우며 마음을 다잡는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만년필의 단단한 질감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다시 나를 써 내려가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