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사다리 01화

프롤로그 - 수요일저녁

사다리

by 정혜영작가

프롤로그:


수요일 저녁

청파옥은 삼십 년째 같은 자리에 있었다. 청파역 삼 번 출구에서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나타나는, 낡은 간판에 '청파옥' 세 글자가 희미하게 남은 술집. 테이블은 여덟 개였고, 우리는 항상 안쪽 구석 자리에 앉았다.

지우가 먼저 와 있었다. 소주병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반쯤 비어 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지우가 소주를 따랐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삼십 년을 알았지만, 아니 삼십 년을 알았기 때문에 굳이 눈을 맞추지 않아도 됐다.

"왔어?"

"응."

나는 소주잔을 들었다. 지우도 들었다. 우리는 동시에 마셨다. 쓰디쓴 소주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오늘 하루가 그랬다. 쓰디쓴.

"이번 주."

지우가 말을 시작했다.

"너 기억하지? 배달하다 사고 난 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 서른한 살.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 열여섯 시간을 일하는 남자.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나는 지난주 화요일 오후에 소독해 줬다.

"그 애 파산했어."

지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담담한 것이 더 잔인했다.

"치료비 못 냈어?"

"어. 할머니 가족이 합의 안 받아줬대. 결국 재판 갔고."

"결과는?"

"민준이 졌지. 당연히. 신호위반 맞으니까."

우리는 또 마셨다. 지우가 안주를 집었다. 오징어. 질겼다. 우리는 씹으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민준이 어떻게 돼?"

"신용불량자지, 뭐. 빚 청산할 때까지 계속 배달 일 하겠지. 근데 신용불량자는 대출도 안 되고, 휴대폰도 못 바꾸고."

"평생?"

"평생."

나는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옆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회식하는 사람들. 건배 소리. 우리는 건배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이것은 축배가 아니라 진혼곡이었다.

"선미야."

"응."

"너는 이번 주 어땠어?"

나는 잠시 생각했다.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강남 병원과 청파역 무료진료소. 한 시간 거리, 다른 세계.

"나도 미쳤어."

지우가 소주를 또 따랐다. 세 번째 잔이었다. 아니 네 번째였나. 우리는 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마셨다.

"얘기해 봐."

그렇게 우리의 수요일 밤이 시작됐다. 삼십 년째 반복되는 의식처럼.



1. 오전 - 강남역 선미 피부과

강남역 의료 빌딩 오 층, 선미 피부과의 아침은 소독약 냄새로 시작됐다. 간호사 수진이 대기실 문을 열었고, 찬 공기가 들어왔다. 일월 중순.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원장님, 오늘 예약 열두 명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료 가운을 입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쉰두 살. 짧게 자른 머리카락에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염색한 지 한 달이 지났다. 파운데이션을 바르면서 생각했다. 의사는 자기 얼굴도 못 고치면서 남의 얼굴은 고친다.

"첫 환자 들어오세요."

대기실 문이 열렸다. 서른다섯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명품 코트, 명품 가방, 명품 시계. 모든 것이 값비싸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등을 곧게 펴고, 무릎을 모으고,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오십 년을 그렇게 앉아온 사람처럼.

"박지영 씨죠?"

"네."

나는 차트를 확인했다. 삼십오 세. 전업주부. 삼 개월 전에도 왔다. 보톡스.

"오늘은 어떻게 오셨어요?"

물어볼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차트에 다 나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물었다. 환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아니해야만 했다.

"이마요."

박지영이 거울을 봤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쓸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봤다. 주름은 없었다. 아니, 있긴 했다. 현미경으로나 보일 법한. 삼십오 세 여자의 이마에 있을 법한 자연스러운 주름.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이 재앙이었고, 나에게는 그것이 백오십만 원이었다.

"삼 개월 전에 맞으셨는데."

"네... 근데 벌써 풀린 것 같아요."

풀린 게 아니었다. 보톡스는 최소 육 개월을 간다.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풀렸다고 느낀다면, 그녀에게는 풀린 것이었다.

"다음 주에 시댁 식사가 있어서요."

박지영이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시어머니가 까다로우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들은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시댁, 남편, 아이들. 그들은 내가 의사라서가 아니라 의사 가운을 입었기 때문에 이야기했다. 가운은 비밀을 지켜주는 것처럼 보였다.

"알겠습니다. 시술할게요."

박지영이 눈을 감았다. 나는 주사기를 들었다. 보톡스. 보툴리눔 톡신. 근육을 마비시키는 독소. 주름을 없애는 마법. 백오십만 원짜리.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박지영은 움찔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오 분. 나는 그녀의 이마에 여섯 번 주사를 놓았다. 그녀는 여섯 번 움찔했고, 여섯 번 참았다.

"끝났어요."

박지영이 눈을 떴다. 거울을 봤다. 당연히 아직 효과는 없었다. 이틀은 지나야 근육이 마비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울 속 자신이 조금 나아 보였다. 플라세보 효과. 돈을 냈으니 나아진 것처럼 느껴지는.

"감사합니다, 원장님."

박지영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 원장님."

"네?"

"남편이 바람피워요."

나는 주사기를 내려놓았다. 박지영은 여전히 거울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지 않았다.

"증거는 있어요. 사진도, 메시지도. 근데..."

"근데?"

"이혼은 못 해요."

박지영이 돌아서서 나를 봤다.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울음을 참는 얼굴. 보톡스를 맞으러 온 얼굴.

"재산이 다 남편 명의예요. 집도, 차도, 주식도. 전 전업주부라... 이혼하면 전 쫓겨나요."

"재산분할은..."

"받는다 해도 얼마 안 될 거래요. 변호사가 그러던데. 게다가 시댁에서..."

박지영이 말을 멈췄다.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듯이. 나는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마른 웃음.

"그냥 참아야죠. 얼굴이라도 관리하면서."

박지영이 가방을 들었다. 명품 가방.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봤다. 곧은 등. 모은 무릎. 오십 년을 그렇게 걸어온 사람처럼.

카드 결제 영수증이 프린터에서 나왔다. 백오십만 원. 나는 차트에 메모했다.

'박지영 / 35세 / 재벌 며느리 / 남편 외도 / 이혼 불가 / 재산 명의 없음 / 보톡스로 버팀'

저녁에 지우한테 물어봐야겠다. 재산분할, 정말 얼마 못 받나.







청파역은 강남역에서 지하철로 삼십 분 거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세계의 거리였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는 동안, 나는 언제나 같은 생각을 했다. 한강은 경계선이다. 이쪽과 저쪽.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청파역 지하 이층. '청파 무료진료소'라는 작은 간판. 나는 이곳에 이십 년 전부터 왔다. 매달 둘째 주 월요일. 이십 년이면 이백사십 번. 나는 왜 오는 걸까. 선의? 속죄? 습관? 나도 모른다.

"원장님, 오셨어요."

간호사 미경이 인사했다. 미경은 환자가 아니라 자원봉사자였다. 환자였다가 자원봉사자가 됐다. 오 년 전, 미경은 이 진료소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지금은 완치됐다. 그리고 돌아왔다. 누군가 도와주면 또 누군가를 돕는다. 나는 그게 부러웠다. 나는 이십 년을 왔지만 여전히 빚을 갚는 기분이었다.

대기실에는 스무 명이 앉아 있었다. 노인, 노숙인, 고시원 주민. 그들은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 휴대폰이 없거나, 있어도 데이터가 없거나. 그들은 그냥 앉아 있었다. 기다림 자체가 그들의 일과였다.

"첫 번째 분 들어오세요."

오십 대 후반 남성이 들어왔다. 낡은 파카, 찢어진 청바지, 더러운 운동화. 얼굴에 동상. 손에 동상. 냄새가 났다. 오래 씻지 못한 사람의 냄새.

"앉으세요."

남자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몸을 움츠렸다. 공간을 최대한 적게 차지하려는 듯이. 나는 차트를 꺼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김철수요."

"나이는?"

"쉰여덟요."

쉰여덟. 나보다 여섯 살 많다. 하지만 그는 칠십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봤다. 동상. 귀, 코, 볼. 피부가 검게 변했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 한 달 전부터요."

"밤에 어디서 주무세요?"

"지하 통로요."

지하 통로. 나는 알았다. 청파역 지하 삼층. 환승 통로. 새벽 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 전동차가 끊기는 시간. 그곳에서 사람들이 잔다. 골판지를 깔고, 담요를 덮고. 역무원들이 쫓아내지만, 그들은 다시 온다. 갈 곳이 없으니까.

"쉼터는 안 가세요?"

"거긴..."

김철수가 말을 멈췄다. 나는 기다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술 마시면 못 들어가요."

"술을."

"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을 들여다봤다. 동상은 이미 깊게 진행됐다. 괴사까지는 아니지만, 시간문제였다.

"약 처방해 드릴게요. 이 연고 바르시고, 이틀에 한 번씩 오세요."

"... 약값은요?"

"여긴 무료예요."

김철수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봤다. 그의 눈에 뭔가 어렸다. 감사? 안도? 아니면 그저 피곤함?

"감사합니다."

그가 일어섰다.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봤다. 볼에 상처가 있었다.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쯤 된.

"그 상처는 어떻게 난 거예요?"

"... 별거 아니에요."

"누가 때렸어요?"

김철수가 멈칫했다. 나는 알았다. 맞았다는 뜻이다.

"신고했어요?"

"신고요?"

김철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누가 믿겠어요. 전 노숙자인데."

그는 나갔다. 나는 차트에 메모했다.

'김철수 / 58세 / 노숙인 / 동상 / 폭행 피해 / 신고 안 함 / "누가 믿겠어요"'

저녁에 지우한테 물어봐야겠다. 노숙자 폭행 사건, 정말 신고해도 소용없나.

다음 환자가 들어왔다. 삼십 대 초반 남성. 헬멧을 들고 있었다. 배달 라이더.

"앉으세요."

"네."

그는 앉으면서도 휴대폰을 확인했다. 배달 앱. 알림이 뜨면 바로 나가야 한다.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

그가 팔을 보여줬다. 왼팔 팔꿈치. 긁힌 상처. 소독하지 않아서 곪기 시작했다.

"언제 다쳤어요?"

"이틀 전이요."

"병원은 안 갔어요?"

"시간이 없어서요."

나는 소독약을 꺼냈다. 상처를 닦았다. 그는 움찔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나는 그의 팔을 보며 물었다.

"배달 중에 다쳤어요?"

"네. 넘어졌어요."

"왜요?"

"신호위반하다가..."

그가 말을 멈췄다. 부끄러운 듯이. 나는 반창고를 붙이며 말했다.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네... 근데 선생님."

"네?"

"진료비는..."

"여긴 무료예요."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의 손을 봤다. 굳은살. 상처. 햇볕에 탄 피부. 하루 열몇 시간을 오토바이를 탄 손.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민준이요."

"민준 씨."

나는 그를 불렀다. 그가 나를 봤다.

"상처 꼭 소독하세요. 안 그러면 큰일 나요."

"네. 감사합니다."

민준이 나갔다.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그는 헬멧을 쓰며 뛰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오토바이 시동 소리.

나는 차트에 메모했다.

'이민준 / 31세 / 배달라이더 / 팔꿈치 상처 / 신호위반 / 소독 안 함 / "시간이 없어서"'

오후 다섯 시. 진료가 끝났다. 오늘 본 환자는 스무 명.

동상 네 명. 상처 여섯 명. 습진 다섯 명. 고혈압 세 명. 당뇨 두 명.

모두 오래 방치된 것들이었다. 병원 갈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무서워서. 그들은 아프다는 사실조차 부담이었다.

나는 진료실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환승 통로를 지나갔다. 거기 김철수가 앉아 있었다. 골판지 위에. 종이컵을 앞에 두고. 나는 멈칫했다. 그리고 지나쳤다. 미안했지만, 나도 지쳤다.

지하철에서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오늘 진료 정리.





1월 13일 월요일 오전 - 강남 병원: 12명 수익: 950만 원 오후 - 청파역 진료소: 20명 수익: 0원


같은 날. 같은 의사. 다른 환자.

나는 창밖을 봤다. 지하철은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물이 검게 흘렀다.






한지우는 그날 아침 일찍 출근했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대형 로펌 '정의 법률사무소' 십팔 층. 지우의 책상에는 파일이 쌓여 있었다. 미결 사건 열다섯 건. 그중 오늘 상담 두 건.

"변호사님, 열 시에 첫 상담이요."

비서 수진이 말했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파일을 펼쳤다. 이민준. 삼십일 세. 교통사고.

열 시. 노크 소리.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헬멧을 들고 있었다. 배달복을 입고 있었다. 출근 전에 온 것이다.

"앉으세요."

"네."

민준이 앉았다. 불안한 얼굴. 지우는 파일을 보며 물었다.

"교통사고라고 하셨죠?"

"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민준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달 전. 배달 중. 신호위반. 할머니와 충돌. 할머니 중상. 치료비 이천만 원. 보험은 최소한으로만. 오백만 원만 커버. 민준 부담 천오백만 원.

지우는 듣다가 물었다.

"합의 시도해 보셨어요?"

"할머니 가족이 안 받아줘요."

"얼마 제시하셨는데요?"

"이백만 원이요. 제가 가진 돈 다..."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우는 파일을 덮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네."

"법적으로 민준 씨가 불리해요. 신호위반 맞으시고, 할머니 다치셨으니까. 재판 가면 지실 가능성 높아요."

"..."

"그러면 천오백만 원 물어내셔야 해요."

민준이 고개를 숙였다. 지우는 기다렸다.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처럼. 상처를 보는 변호사처럼.

"돈이 없으면요?"

민준이 물었다. 작은 목소리.

"파산하셔야죠."

"파산이요?"

"네. 신용불량자 되시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돼요?"

"대출 안 돼요. 신용카드 못 만들어요. 휴대폰 할부도 안 되고."

"..."

"그리고 빚 다 갚을 때까지 계속 그 상태예요."

민준이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이 붉었다.

"선생님, 저 어떻게 해요?"

지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변호사는 법을 다루지 운명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이 순간 지우가 보는 것은 법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최선을 다해볼게요. 할머니 가족 설득해서 합의 이끌어내고."

"감사합니다."

민준이 일어섰다. 헬멧을 들고. 그는 나갔다. 지우는 파일에 메모했다.

'이민준 / 31세 / 배달라이더 / 교통사고 / 신호위반 / 합의 불가능성 높음 / 파산 가능성'

오후 세 시. 두 번째 상담.

"들어오세요."

사십 대 중반 남자가 들어왔다. 정장. 명품 시계. 깔끔하게 빗은 머리.

"박민수 씨죠?"

"네."

"앉으세요."

박민수가 앉았다. 여유로운 자세.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고. 이 공간에 익숙한 사람처럼.

"이혼 상담이라고 하셨는데."

"네."

"사유가 뭔가요?"

"아내가 바람 폈어요."

박민수가 말했다. 감정 없는 목소리. 차가운.

"증거 있으세요?"

"있죠."

박민수가 봉투를 꺼냈다. 사진들. 호텔 앞. 차 안. 지우는 사진을 봤다. 명백했다.

"재산은 어떻게 되세요?"

"아파트 십오억. 제 명의요. 주식 오억. 역시 제 명의."

"자녀는요?"

"둘. 중삼, 초육."

"양육권은요?"

"당연히 제가 가져가야죠. 아내가 잘못했는데."

지우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재산 이십억. 재산분할 오십 퍼센트. 십억. 위자료 오천만 원. 양육비 월 삼백만 원.

"부장님."

"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내분이 최소 십억은 가져가실 거예요."

"뭐라고요?"

박민수가 벌떡 일어섰다.

"바람 폈는데 십억을 줘요?"

"재산분할은 별개예요. 누가 잘못했든 오십 대 오십이 원칙이에요."

"말도 안 돼!"

박민수가 소리쳤다. 지우는 침착하게 말했다.

"법이 그래요."

"법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

"..."

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법이 잘못됐는지, 세상이 잘못됐는지. 변호사가 판단할 일은 아니었다.

박민수는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앉았다. 주먹을 쥐고.

"그럼 어떻게 해요?"

"합의를 보시든지, 재판을 하시든지."

"재판하면요?"

"시간 오래 걸려요. 일 년? 이 년?"

"그동안 아내랑 같이 살아요?"

"별거하시면 되죠."

박민수가 한숨을 쉬었다. 깊고 긴 한숨.

"변호사님."

"네."

"세상이 원래 이렇게 불공평한 건가요?"

지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저녁 여섯 시. 지우는 퇴근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회전문을 나섰다. 찬 바람이 불었다.

지우는 걸으며 생각했다. 오늘 만난 두 사람. 민준과 민수. 같은 '민' 자. 다른 운명.

민준: 천오백만 원 못 내서 파산. 민수: 십억 줘야 해서 분노.

천오백만 원과 십억.

지우는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청파역. 선미와 만나기로 한 곳.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삼십 년째 반복되는 수요일이니까.




"그래서 그 배달 라이더 애, 어떻게 돼?"

선미가 물었다. 지우는 소주를 마시고 대답했다.

"파산할 거야. 할머니 가족 설득했는데 안 통해."

"합의금 얼마 원한대?"

"천오백. 치료비 다 내라는 거지."

"민준이가 낼 수 있어?"

"없지. 그 애 통장에 오십만 원밖에 없대."

선미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 그 애 봤어."

"응?"

"오늘 오후에. 무료진료소에서. 팔에 상처 났더라."

"많이 다쳤어?"

"아니. 그냥 긁힌 상처. 근데 소독 안 해서 곪았어."

"왜 안 했대?"

"시간 없대. 병원 갈 시간."

지우가 소주를 또 마셨다.

"그 애, 신호위반한 이유 알아?"

"왜?"

"배달 앱에서 시간 압박하니까. 늦으면 콜 안 오고. 콜 안 오면 못 벌고."

"..."

"그래서 신호위반하고, 그래서 사고 나고, 그래서 파산하고."

선미도 소주를 마셨다.

"나도 오늘 미친 환자 있었어."

"누구?"

"재벌 며느리. 서른다섯."

선미는 박지영 이야기를 했다. 남편 외도. 이혼 못 함. 재산 명의 없음.

"물어볼 게 있는데."

"뭐?"

"재산분할, 정말 얼마 못 받아?"

지우가 웃었다. 쓴웃음.

"못 받긴. 반은 받지."

"반?"

"응. 오십 대 오십이 원칙이야."

"그럼 그 여자..."

"재벌이면 재산이 얼마나 되겠어. 백억? 이백 억? 반만 받아도 오십억, 백억."

선미가 멈칫했다.

"그런데 왜 이혼 안 한대?"

"잘 모르겠는데... 아, 혹시 혼전 재산 아닐까? 결혼 전에 남편이 이미 가진 거. 그럼 재산분할 대상 아니야."

"..."

"아니면 그냥 모르는 거지. 자기가 얼마 받을 수 있는지."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옆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건배 소리.

"선미야."

"응."

"오늘 나한테 온 사람 또 있어."

"누구?"

"대기업 부장. 사십오 살. 이혼하는데 십억 줘야 한대."

"십억?"

"응. 재산 이십억인데 반 줘야 하니까."

"..."

"그 사람 말이, 말도 안 된대. 아내가 바람 폈는데 왜 십억을 주냐고."

선미가 소주를 따랐다.

"십억이 면."

"응?"

"민준이 육백육십 명 살릴 수 있어. 천오백만 원씩."

지우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두 사람은 또 마셨다.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한참 후 선미가 물었다.

"지우야."

"응."

"이게 같은 나라 맞아?"

지우는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창밖을 봤다. 청파역 입구. 사람들이 오간다. 어떤 사람은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어떤 사람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어떤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탄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응?"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지우가 선미를 봤다.

"그냥 다른 층인 것 같아."

"다른 층?"

"응. 같은 건물인데 다른 층. 민준이는 지하에 있고, 박민수는 이십 층에 있고, 재벌은 삼십 층에 있고."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는 있어. 근데."

"근데?"

"재질이 다른 것 같아. 어떤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고, 어떤 엘리베이터는 고장 나고, 어떤 엘리베이터는 내려가고."

선미가 웃었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사다리 같네."

"응?"

"사다리. 어떤 사다리는 튼튼하고, 어떤 사다리는 부러지고."

지우도 웃었다.

"맞아. 사다리."

두 사람은 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부딪쳤다. 작은 소리.

"웬만큼."

선미가 말했다.

"웬만큼 살아야지."

지우가 대답했다.

"응. 웬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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