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Break time이 필요한 이유
자크 데리다는
1930년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이다.
철학뿐 아니라 문학, 회화, 정신분석학 등 문화 전반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철학에 해체 개념을 도입한다.
저서로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 <해체>, <법의 힘>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텍스트 읽기를 통하여 작가가 텍스트에서 의도하고 표현하였던 것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새롭게 생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텍스트를 읽는 것은 복원 작업이 아니라 해체 작업이 되어야 한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개념과 맞닿아 있다.
`롤랑 바르트`도
작품이 아닌 텍스트Texte를 통해 독자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해석하고 변형시키는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가 글의 모든 의미를 고정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다양한 재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독자의 즐거움을 뺏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의미는
바로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서 저자의 의도가 강요돼서는 안 된다.
[출처] 나무위키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데리다는 해체작업이 있어야 한다며 `탈구축deconstruction`을 주장하고 있다.
`탈구축deconstruction` 이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의 `해체destrucktive`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하이데거는 `가차 없이 버리다` 또는 `다 없애 버리다`와 같은
부정적인 뜻의 `파괴`와 구별하여 `해체destrucktive`하자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데리다는 `해체destrucktive`를 `탈구축deconstruction` 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출판-
데리다는 스스로 원래부터 자기 사상이 정치적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결국 데리다가 탈구축하려고 한 것은 `계층 질서`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지배적인 계층 질서를 전도하겠다는 뜻이라고 데리다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살던 그 당시는
소련을 비롯하여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데리다는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공산주의의 망령은 언제나 나왔고 계속 나올 것이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출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데리다는
`탈구축`을 외치면서 대안으로 `우애의 정치`, `무조건의 환대`, 무한의 책임`을 말하고 있는데
명확한 해법은 말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출판-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현 상황에 대해서는 분석을 잘하고 있다.
용어의 사용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거의 대등하게 현실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학자들조차도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고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 대안은 한 사람만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가 함께 의논한 후 대안을 마련하고
그 대안을 전 세계가 동시에 행해야만 해결이 될 사안이기 때문이다.
외계인이 침입해 왔는데 한 나라만 대항하고 있고 다른 나라는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온 세계가 합심하여 대항해야만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데리다가 말하는 `탈구축`을
정치적인 차원보다는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제 한 번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고정관념들에 대한 `탈구축`을 해보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번아웃`이 보일 것 같으면
과감하게 개인만의 안식년을 가져보는 것이다.
쉬다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은 어떻게 될지 걱정하지 말기를 바란다.
지금 번아웃이 온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나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직장 상사가 알아보고 쉼을 권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면서 기어이 붙들고자 하는 것을 놓고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세상의 것들에 한번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다.
행복이 돈이나 지위나 결과물이 아닌
나의 정신 체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책을 읽어서 알고 있지 않은가.
단지 두려워서, 바보 같은 생각 같아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뿐이다.
일에 쫓기어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에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고
또 새로운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탐색한다는 것은
지쳐있는 상태에서 행하는 것이므로
제대로 된 결과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고 성급한 결과를 다시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시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쉼을 통해서 찾아보는 것보다 엄청난 수고와 시간을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쉼을 택하여 불안하고 그래서 쫓기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쉼 곧 `break time`이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보여 줄 것이고
내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 것들,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탈구축deconstruction`이다.
삶의 기본적인 욕망은 `결여의 욕망`이고
나를 찾는 욕망은 `생산하는 욕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것처럼 `수목형 욕망`은 계층적 질서에
얽매이는 것이고 `리좀적 욕망`은 유목민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다.
결국 `리좀적 욕망`이나 `탈구축`은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질서에서 벗어나 보기 위한 아우성일 것이다.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가
하루하루 일용직으로 `결여의 욕망`을 충족하면서
자신의 철학적인 체계를 완성한 것은 나의 삶의 세계를 `탈구축`하여
'리좀적 욕망`을 행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쉼 곧 `Break time`에서 만들어지는 `여유`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만일 `결여의 욕망`을 선택하여 살아가기로 결정했다면
그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결정이다.
다만 이러한 선택의 결과로 인해 다가오게 될지도 모를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함, 피곤함과 힘듦을
느끼더라도 낙담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 도전해 볼걸`같은 힘을 빠지게 하는 생각은 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독여야 할 것이다.
또는
`리좀적 욕망`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큰 것을 행할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소 작고 소박하고, 남들이 봤을 때 별것 아니지만
나 자신에게는 큰 의미를 주는 그런 것을 해도 괜찮은 것이다.
분명 `break time`은 나에게 `웜홀`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