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티 오이디푸스 VS 리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욕망을 계속 추구할 것인가?

질 들뢰즈는

1925년 태생의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차이와 생성의 철학자로 유명하며, 리좀과 수목, 탈영토화, 탈코드화 등

독창적인 어휘들을 창시하였다.

저서로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차이와 반복>, <감각의 논리> 등이 있다.

[출처] 나무위키, 위키백과


구글 이미지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는

1930년 태생의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정신 분석학자이면서 질 들뢰즈와의 철학 콤비로 유명하다.

저서로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세 가지 생태학> 등이 있다.

[출처] 나무위키, 위키백과


구글 이미지 -펠릭스 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면서
욕망은 다양한 방향으로 흘러가며, 이것을 규제할 수 없다고 한다.
만일 욕망을 규제하는 질서가 있다면 욕망은 그것을 파괴할 것이다.
그럼므로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라고 말하면서 이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표현한다.

곧 인간은 '욕망하는 모든 기계'라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기계`란 한편에서는

모든 부품이 연결되지 않으면 동작하지 않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연결의 필연성이 없음을 보여 준다고 말하며

이 양면성이 `연결의 부재에 따라 연결된다`고 말한다.


즉 욕망은 다양한 것과 연결되는데, 그 연결을 언제든 끊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어머니를 손에 넣으려는, 또한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항심을 품고 있는 전혀 다른 심리 상태가 마음속에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심리를 받아들이는 상황을 말한다.

[출처] 위키백과


이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끼치는 영향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진 어른의 이성은
연상의 어머니, 아버지 같은 사람을 선택하거나 연하를 선택한다.

어머니, 아버지 같은 연상의 사람을 선택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지속된 유아적 의존 욕구를 그동안 부모로부터 받아왔으며
그러한 욕구를 연장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연하를 선택하는 이유는
부모와의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오이디푸스적 갈등으로 자신 보다 오래 살만한
더 어린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그 두려움을 해소시키기 위함이다.

[출처] 위키백과


이러한 오이디푸스적 분석을 보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와 라캉은 인간의 욕망을 가족 안에 묶어 두고 다양한 가능성을 막아 버렸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식물의 뿌리줄기를 뜻하는 `리좀'을 차용하고 있는데


식물학에서 `수목tree`은 뿌리와 가지와 잎이 위계를 가지며
기존의 수립된 계층적 질서를 쉽게 바꿀 수 없는 반면

`리좀Rhizome`은 뿌리가 내려 있지 않은 지역이라도 번져나갈 수 있는
번짐과 엉킴의 형상을 지지한다.

[출처] 위키백과


이처럼 수목tree과 리좀Rhizome의 특징 중

`리좀Rhizome`의 특징을 차용하여 욕망을 설명하고 있다.



리좀Rhizome이 다양한 방향으로 퍼지고
다른 뿌리들과 다양한 형태로 연결되는 것처럼 욕망도 분열적이고 유목적이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고 말한다.


말하자면 욕망이란 것은 프로이트와 라캉이 말한 것처럼

한 방향에서 영향을 받고 그 방향으로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 아닌

방사형으로 영향을 받고 방사형으로 욕망을 분출한다는 말이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어휘를 택한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욕망은


특정한 모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분열적인 과정을 따라 움직이는데
더욱이 여기서 욕망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결여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생산하는 욕망`을 뜻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철학사전-


프로이트의 욕망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곧 아버지에게는 있지만 나에게는 없는 어떤 그러한 부족함

곧 결여의 욕망을 말하는 것이고


라캉의 욕망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욕망으로써


라캉에게 '욕망의 세계'로의 진입은 타자에 의한 소외의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라캉의 어떤 측면을 따르든 간에 주체의 소외의 극복은 결여로서의 욕망을 통해서 달성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욕망 [慾望, Desire]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쉽게 말하면 나에게는 없고 타자에게는 있는

그래서 나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을 욕망한다는 뜻이겠다.


이러한 `결여로서의 욕망`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비판하면서 `생산하는 욕망`의 의미를 주장한다.


`생산하는 욕망`은

먹고 살만큼 모든 것을 다 가져서 부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그런 욕망이다.

이들은 없어서가 아니라 가졌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산하는 욕망`은 추구하는 욕망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찬사를 받을 수도 있다.

E=mc^2 이라는 이론을 생산했다고 했을 때 이를 어디에 쓰느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하는 욕망`은 도덕과 윤리와 상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그런 부작용에 대해서는 책임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욕망이 도덕과 윤리와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결여로서의 욕망`이든 `생산하는 욕망`이든

`리좀`적인 상하좌우로 분열하면서 화합하는 욕망이든

우리에게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고


또 그것이 `타자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일지라도

`나`가 움직여서 이루어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꿈에 불과한 욕망일 될 것이다.


SNS를 통한 `과시의 욕망`이 아닌

남을 파멸로 이끄는 욕망이 아닌 또는 전 인류를 파멸시키려는 욕망이 아닌


진정으로 `나와 인류`를 위해서 필요한

아니면 그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의

나만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식주가 해결되었거나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얻었을 때도

`지금 내가 생각하는 욕망을 추구할 것이냐`는 물음에 어떤 답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욕망을 찾기가 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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