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 아비뇽
아비뇽. 학창시절에 배웠던 세계사가 은은히 기억나시는 분이라면 그렇게 낯설지는 않을 이름이다. 한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교황의 권위가 완전히 몰락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교회의 대분열을 초래했으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는 '콘클라베'가 교황 선출 방식으로 자리잡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교과서적인 설명을 굳이 서두에 올리는 이유는, 바로 이게 내가 아비뇽을 보고 싶었던 이유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야기가 있는 여행지를 굉장히 좋아한다. 사실 오래된 여행지라면 당연히 그에 얽힌 이야기 몇 자루쯤은 있겠지만, 역사에 나름 굵직한 족적을 남긴 곳을 직접 보는 일은 언제나 특별하다.
아비뇽은 굉장히 직관적인 도시였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있었다. 성벽으로 감싸인 아비뇽의 구 시가지가 역 정면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역사도시다운 풍모를 제대로 보여주는 아비뇽의 구 시가지 정문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알고보니 아비뇽은 유수 이후로는 별다른 난리를 겪어보지 않는 평화로운 도시라 문화재 보존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관광센터에서 도시 지도를 받아서는, 아비뇽에서 만나기로 한 카우치서핑 호스트의 집으로 갔다. 아비뇽에서 유학 중인 브라질 친구였는데, 굉장히 친절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비뇽의 구시가지는, 정말 작았다. 사실 볼만한 곳은 교황청 정도밖에 없는지라, 과장 조금 보태서 반나절 조금 안 되는 시간만에 다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다 보고 난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고, 당시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현장을 걷고 있다는 생각에 교황청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위의 광장에서 한 삼분정도만 걸어가면 주위의 여느 건물들보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건물을 마주할 수 있다. 교황청이다.
10년 전. 정말 딱 10년 전에 가족끼리 유럽 여행할 때에 바티칸의 교황청을 들렀던 기억이 났다. 강산이 한 번 변하는 시간이 지난만큼 기억이 그렇게 생생하지는 않지만, 가톨릭의 총본산인만큼 굉장히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으리으리했던 인상만큼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이 아비뇽의 교황청은 바티칸의 교황청과는 영 딴판이었다. 사실, 교황청이라기 보다는 '요새'에 더 가깝다는 느낌. 카메라에 다 담기지도 않는 덩치인 건 피차일반이긴 하다만.
사실 기대를 그렇게 많이 한 것치고는, 실내에선 그렇게 볼만한 건 없었다. 여느 성당처럼 금은보화로 한껏 치장한 성물이나,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대가의 회화나 조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시종일관 '와, 크다' 정도의 느낌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다 보고 기념품점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게 정말 끝이라고? 싶어서 황당하기까지 했을 정도.
사실상 아비뇽에 온 가장 큰 이유였던 교황청이 다소 허무하게 빨리 끝나자, 다른 곳을 찾아보아야 했다. 카우치서핑 호스트가 돌아오는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기 때문. 나중에 따로 지면을 할애해서 이야기 하겠지만, 카우치서핑의 단점 중 하나가 이거다. 호스트의 집에서 한 번 나오면 자기 마음대로 다시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것. 일단은 그냥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지도도 필요없었다.
말 그대로 정처 없이 걷다보니, 시장 앞에 벼룩 시장이 열려있었다. 벼룩 시장이라기엔 조금 마니악한 물건들도 꽤 눈에 띄었는데, 개중에 구형 타자기가 있던 것도 기억난다. 글 쓰는 걸 좋아하다보니, 개인적으로는 타자기로 글 써보는 게 로망이어서 굉장히 탐났다. 물론 그렇다고 사지는 않았다. 사봤자 들고갈 수도, 들고 와도 쓸 수도 없을 테니까..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갖고 싶은 물건 1순위이긴 하다.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외관과는 달리, 시장의 실내는 굉장히 깔끔했다. 하지만, 그게 재미를 반감시키지는 않았다. 시장을 둘러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뭔가를 사지는 않아도, 신기한 것들이 많고 우리에겐 낯익은 것들도 낯선 장소에서는 또 다르게 보인다. 사실, 어느 나라의 시장이건 '외국은 역시 우리랑 다르구나' 와 '외국도 우리랑 크게 다르지는 않구만' 이라는, 다소 상반된 두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사진에서처럼, 생뚱맞은 채소가 익숙한 채소들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걸 봤을 때 드는 그런 오묘한 느낌이 외국의 시장엔 있다.
아비뇽 시장에서 제일 신기하고 색달랐던 건 이 소금이었는데, 소금에 샤프란이나 허브 등 향신료를 섞어서 판매하고 있는게 굉장히 색달랐다. 게다가 그런 소금을 실험실에서나 쓸 법한 자그마한 유리용기에 나눠담아서 팔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이것도 사고 싶기는 했는데, 여행 끝까지 무사히 지켜줄 자신이 없었다. 이런 것도 장기 여행의 단점이라면 단점이겠다.
시장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아비뇽 구시가지 북쪽으로 갔다. 아비뇽은 북 쪽으로 론(Rhone) 강이 흐르는데, 이 론 강은 북쪽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진 프랑스 제 3의 도시인 리옹(Lyon) 일대의 와인 산지가 '꼬뜨 드 론(Cote de Rhone)'이라고 불리게 된 원인제공'강'이기도 하다. 뭐, 아비뇽에선 특이한 술을 마시거나 와이너리를 방문할 수는 없으니 와인 냄새가 묻어있는 거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론 강은 넓었고, 컸다. 한 때는 교황권과 왕권의 각축장이었던 아비뇽도 한 때는 그랬겠지만, 지금은 그저 한적한 시골 동네로 남아있는 걸 지켜보는 기분은 참 묘했다. 그러고보면, 그 때 그 시절의 복잡하고 굴곡 많은 역사도, 지금의 이런 한적하고 평화로운 역사도 시간이라는 강 위에 놓인 징검다리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