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 디종, 마르사네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도 꿈을 가진다. 요즘에 와서는 흔히 '로망'이라고 불리는, 흔히 'A에서 B를 해봐야지'하는 식의 소망이다. 나에게는 이번 여행에서 그 'A'가 될 장소 중 하나가 바로 디종이었다. 콕 집어 말하자면, 디종의 포도밭. '코트 드 뉘'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포도밭들이 모여있는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어떤 'B'가 내게는 로망이었을까. 몰랐다. 와인 시음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운 좋게 와이너리에 불법 노동자로 고용돼서 일을 해본다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독특하고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 하나 또렷한 'B' 없이, 나는 디종으로 왔다.
디종에도 호스텔은 없었기에, 그나마 싼 호텔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1박 45유로짜리 호텔을 잡게 되었다. 이 당시엔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니었다. 유럽에 서식하는 침대 속 빈대인 '베드 버그(Bed Bug)'에 물려 오른팔이 아주 만신창이가 된 것. 잘 때 베개 밑에 손을 넣고 자는 버릇이 있다 보니, 오른손만 베드 버그의 회식장이 된 셈이었다. 처음엔 모기에 물린 건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베드 버그였더라. 유럽 여행 가시는 분은 조심하시기 바란다. 물리면 정말 지독하게 간지럽고, 긁으면 흉터가 남는다. 덕분에 내 오른팔엔 흑염룡이 살게 되었다.
보르도와는 달리, 디종은 포도밭까지 가는 방법이 꽤나 다양하게 있는 편이었다. 그래도 차가 있으면 좋다는 건 당연하긴 했지만, 뚜벅이들에게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디종의 포도밭을 여행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지만, 디종 시내에서부터 코트 드 뉘의 끝자락인 뉘 샹 죠흐주까지는 Route de Grand Crus라는 일직선의 긴 도로가 이어주고 있기에, 시간과 근성만 남아돈다면 걸어서도 못 갈 거리는 아닌 것이다.
마르사네 마을로 간다. 조금 걸어나가니 보였다. 포도밭이다. 하늘 아래 길이 아닌 곳은 모두 포도밭으로 메워진 것처럼 펼쳐져있다. 아직 5월 초인만큼,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있지는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떻게 보면 다소 기괴한 모양으로 땅에서 솟아있는 갈색의 포도나무들은, 꼭 무용수 같았다. 심오한 주제를 몸짓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현대 무용수. 나는 포도나무들의 군무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남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밭마다 포도나무의 성장 상태가 달랐다. 어떤 밭에서는 포도나무에서 이미 새순이 올라와 가지를 뻗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밭에서는 아직 초록색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바로 지척 간임에도, 밭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나눠진 구획을 클리마(Climats)라고 하며, 일조량, 배수, 토질, 포도나무의 나이, 밭 소유주의 관리법 등등, 같은 밭은 하나도 없다. 이 차이들이 포도주에게 테루아르(Terroir)를 부여하는 것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마르사네 마을에 도착했다. 정말이지, 한적함 그 자체를 보여주는 마을. 관광안내소를 찾아가 보니, 열지 않았다. 버스 정보나 와인 시음을 제공하는 곳이라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결국은 그냥 무작정 계속 걸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만 있을 건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에 그렇게 구애받을 필요는 없었다. 사실, 그냥 이 한적함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오고 싶은 곳에 있었고, 어디로 가도 아쉽지는 않을 것 같았으며 여기서 여행이 끝난다고 해도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을 것이었기에. 그냥 그런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마을엔, 여행자가 없었다. 아니, 여행자는 둘째 치고서라도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날씨까지 좀 어둑어둑했다면 사일런트 힐 같은 분위기였을 게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였다. 하긴, 어지간하면 한창 와이너리가 바쁠 시기인 5월 즈음해서는 방문할 사람이 없어야 정상이겠지. 그렇게 썰렁한 마을을 한참 돌아다니려니, 문이 슬쩍 열려있는 도멘(Domaine)이 눈에 띄었다. 열려있으면 들어가도 된다는 뜻이겠지. 나는 들어가자마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사람은 없었다. 대신, 여기가 도멘이라는 걸 알려주는 숙성고가 눈에 띈다. 오크통이 반듯하게 정렬해있는 모습이 반가웠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있노라니, 집에서 인상 좋은 아저씨가 나와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너 여행자니?'
'그런데요. 혹시 와인 시음 가능한가요?'
'시기가 별로 안 좋네. 요즘은 되게 바쁘고 어디 가든 와인 시음도 어지간하면 못할 거야. 대신 저 아래로 가봐. 샤또 드 마르사네는 일 년 내내 시음을 제공하거든.'
물론 이건 지금의 내 손끝에서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고친 것이다. 내 프랑스어 숙련도는 프랑스인의 영어 숙련도와 비슷하기에, 우리 둘은 서로서로 버벅거리면서 이 대화를 해야 했다. 사실, 우리나라도 촌구석으로 가서 중국어나 일본어 하면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하듯, 프랑스에서도 '백인이니 영어를 우리보다는 잘 하겠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어쨌든 그 아저씨한테 짧은 프랑스어로 '메르시' 하고 돌아서서, 아저씨가 알려준 샤토 드 마르사네로 향했다.
오 분 정도 걸어나가니, '샤또 드 마르사네'라고 큼지막하게 써붙인 게 보였다. 사실 보르도 지방의 와이너리는 '샤또(Chateau)', 부르고뉴 지방의 와이너리는 '도멘(Domaine)'이라고 이름 붙이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다. 마르사네 마을의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다 고만고만한 크기인 데 반해, 이 샤또 드 마르사네는 상당히 큰 규모의 와이너리였다. 그래서 시음이 항시 가능한 듯했다. 드디어 부르고뉴에서 와인 한 잔 해보겠구나.
들어가 보니, 시음만 하는 건 안되고 투어를 꼭 해야 한단다. 시음만 하나, 투어를 하고 시음을 하나 어쨌든 드는 돈은 비슷하기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그렇게 투어를 고집하는 걸 보니 뭔가 특별한 게 있나 보다, 싶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게 대단할 것은 없는 투어였다.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밭과 지하 카브 정도만 소개하고 끝. 아무래도 이런 큰 와이너리의 직원인만큼, 가이드도 영어를 할 줄은 알았는데 프랑스어 억양이 너무 묻어있어서 알아듣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사실 워낙 비수기라서 손님도 나밖에 없었으니, 이것저것 다 열어서 보여주는 것까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이십 분 남짓한 투어가 끝나고, 드디어 목을 축일 차례.
의외로 시음은 상당히 많이 시켜줬다. 저 아홉 병 모두 맛볼 수 있었는데, 당연히 '시'음인 만큼 양은 많지 않았지만 종류가 다양한 편이 더 낫다. 화이트 와인부터 레드 와인 순으로 시음을 진행했는데, 개인적으로 이렇게 다양한 와인을 한 자리에서 마셔보는 건 처음이라 상당히 이채로웠다. 대체로 나이가 많지 않은, 산미가 도드라지는 와인들이었는데, 낮은 등급의 밭에서 나온 와인과 프리미에 크뤼 밭에서 나온 와인은 정말 딴판이었던 점. 또, 그랑 크뤼 밭에서 나온 와인이 꼭 내 입맛에서도 그랑 크뤼는 아니라는 점 - 그러니까 프리미에 크뤼나 그 이하의 밭에서 나온 와인이 내 입맛에 더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시음을 마치고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지금은 걷고 있지만, 그렇다고 더 편히 돌아다닐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 선택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혹시 여기서 본 로마네까지 가는 방법 알아?'
'어떻게. 버스?'
'아무렇게나. 제일 편한 게 뭔데?'
'버스가 있긴 한데, 외국인이 타긴 너무 힘들 거야. 배차간격도 길고, 정류장도 찾기 힘들어. 오늘은 그냥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고, 내일 기차를 타고 가는 게 어때? 쥬브레 상베르탱하고 뉘 샹 죠흐주에 기차가 서거든.'
'그게 낫겠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선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느낀 대화였다. 그렇게 샤또 드 마르사네를 뒤로 하고, 또다시 걸었다. 다음 목표는 쥬브레 샹베르탱. 남쪽으로 뻗어있는 루뜨 드 그랑 크뤼에는,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만 같은 포도밭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햇빛이 유난히도 밝은 그 날의 하늘 아래 루뜨 드 그랑 크뤼에서는, 걷고 있는 건 오직 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