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 디종
다음날, 날 깨운 건 디종 시내에서 쥬브레 샹베르탱까지 걸은 다리의 근육통도, 쨍쨍한 햇빛이 내리쬐는 길을 모자 하나 없이 6,7시간을 걸은 후 찾아온 일사병도 아니었다. 가려움이었다. 베개 밑에 손을 넣고 자는 잠버릇이 있는데, 오른손이 완전히 집중포화를 맞은 것처럼 울긋불긋 부어있는 것이었다. 부어오른 자리는 엄청나게 가려웠는데, 그래서 나는 그게 그냥 모기 때문인 줄 알았다. 물파스 발라두면 알아서 가라앉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한국에서 모기에 물렸을 때보다 훨씬 더 가렵긴 했지만 외국 모기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멍청한 생각 덕분에 지금도 내 오른손은 흉터 투성이다. 나중에 프랑스를 떠나서야 그건 모기가 아니라 빈대, 영어로는 '베드 버그(Bed bug)'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당시에 알았더라면 호텔한테 약값이라도 받아냈을 텐데, 너무 늦었다. '아는 게 힘이고, 모르는 게 죄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가려움을 뒤로 미뤄두고, 일단은 밖으로 나왔다. 뉘샹죠흐주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기에, 아점을 먹어두기로 한 것.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디종 시장이 있다기에,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들러본 유럽의 여느 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장의 모습이 이제는 꽤 익숙했다. 혹시 샌드위치나 파이처럼 금방 먹을 수 있는 게 있으려나, 싶었지만 없었다. 결국 그 앞 까르푸에서 양 하나는 더럽게도 많아 보이는 냉동 라자냐를 샀다. 그리고, 삼분의 일도 못 먹고 다 버려야 했다. 맛이 너무, 정말 너무너무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와 친한 사람들은 이 표현 하나로 그 라자냐가 얼마나 맛이 없었는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빈대 물린 자리를 벅벅 긁으며,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워낙 느끼해서 니글니글 거리는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들으며, 세탁비를 아끼려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입은 추레한 몰골로 내 꿈이었던 곳으로 향했다. 실제로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글로 옮겨놓고 나니 이 당시의 나는 정말 불쌍해 보이는구나.
보시다시피 날씨가 좀 흐렸다. 일기예보를 보니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유럽 날씨를 예측하는 컴퓨터가 알파고라도 믿지 말아야 한다는 걸 이미 지난 여행에서 절절히 느낀 후였기에 걸음을 서둘렀다. 역에서 십분 정도 걸어나가니, 어제 봤던 여느 마을들처럼 인적 드문 시내가 보였다. 본 로마네까지는 아직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했다.
날씨는 달라졌지만, 풍경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간혹 포도밭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건넸다. 컨디션은 최악에 날씨도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인지라 그들의 인사말처럼 '좋은(Bon)+하루(Jour)'가 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일단 계속 걷는다. 사실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더라도 나는 이 길을 걷고 있을 것이었기에. 적어도 햇빛은 쨍쨍하지 않아서 오히려 어제보다 걷기는 한결 더 수월하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와인의 성지라고 할 만한 이 곳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부르고뉴의 본 로마네. 저 표지판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보아온 그 어떠한 표지판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였다. 염원하던 곳을 밟은 순례자의 심정이 이때의 내 심정과 아마도 비슷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 풍경을 마주했을 때의 감정을 적으려면 키보드를 쉽사리 누를 수 없다. 오고 싶었던 곳을 왔고, 보고 싶었던 것을 봤을 때의 그 충족감. 나는 홀린 듯이 본 로마네의 심장부를 향해서 또 걸어나갔다.
본 로마네 마을이다. 역시 사람은 없었다. 배터리를 아끼려고 꺼놨던 핸드폰을 켜서 구글맵으로 'Domaine de la Romanee Conti'를 검색했다. 부르고뉴 중에서도 이 본 로마네, 그리고 본 로마네 중에서도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를 꼭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본 로마네에 왔다는 실감은 의외로 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으리으리하고 멋져서라기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들을 생산해내는 도멘들이 있는 곳인데도 관광객인 듯한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동네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나밖에 없긴 했지만). '다른 데는 몰라도 여기엔 좀 사람이 많겠지'싶었는데, 웬걸 여기도 썰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비유하자면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앞에 나만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가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 곳에 내가 나타난 것이겠지만. 의외로 엄청나게 으리으리하다거나 멋진 고성이 아니었다. 한 병에 수천만 원까지 하는 와인을 만들어내는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박한 건물이 굳게 닫힌 철문 뒤로 보였다. 사실 벨에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라고 쓰여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여기가 정말 그곳이 맞는지도 몰랐을 거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는데,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 삼십 분 정도 기다렸는데도 지나가는 사람도, 인기척도 없어서 일단 주변을 좀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사실 이 지도가 이 본 로마네 마을이 관광객에게 제공하는 많지 않은 정보 중 하나다. 사실 유일한 정보라고 해도 무방할 듯 싶다. 본 로마네 역시 루뜨 드 그랑크뤼에 위치한 여느 마을과 엇비슷한 크기였음에도 여긴 관광안내소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와인 시음이 가능했던 카브도 딱 한 곳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카브조차도 내가 갔던 때는 영업을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이 곳엔 식사를 할만한 레스토랑 같은 곳도 눈에 띄지 않았다. 멈춰있다. 본 로마네를 한 바퀴 정도 둘러본 후에 든 느낌은 그랬다. 적막했고, 행인도 없었다. 그때의 본 로마네는 마치 거대한 무대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무대에 홀로 서있는 배우 같았다.
지도대로 조금 걸어나가니,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이 다시 한 번 보였다. 지금까지 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봤던 여느 포도밭보다도 특별한 곳이 저 앞에 있었다. 이 길을 쭉 걸어가서 왼쪽으로 가면, 그곳이 나온다. 로마네 콩티 밭이다.
생각해보면, 한 번도 꿈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물질로 존재하는 그런 꿈에 내가 물리적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있었다. 로마네 콩티의 포도밭으로 한 걸음씩 걸어나가면서, 나는 내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내 발이 스치는 소리가 나 혼자만의 공간인 것만 같은 이 곳에서는 너무도 쉽게 들려왔다.
로마네 콩티 밭의 포도나무들은 이제 막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술이 될 포도를 맺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푸릇한 새순이 뻗어있는 가지 틈새를 찢고 나왔고, 하늘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땅이라는 요람에 안겨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는 내가 있었다. 누가 반겨주지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불쌍해보이는 몰골이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언젠가 이 나무에 열린 포도들이 술로 변하게 되면, 내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도, 여기 오기까지 내가 들려줬던 발소리도, 내가 이 곳에 있음으로써 달라졌을 무언가도 그 술에 담길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어느 하루, 언젠가는 한 잔에 담길 순간, 내 기억 속에 아로새겨질 것만 같았던 시간에 나는 그곳에 있었다.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5월 3일, 본 로마네 마을의 로마네 콩티 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