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 프라이부르크
그동안 포스팅이 없었던 점 사과드린다. 나태에도 관성이 붙는다. 내일 쓰자고 다짐한 것이 모레가 되고, 모레 쓰자고 다짐한 것이 글피가 되고... 그러다 보니 거의 반년만에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아서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 사실 이 여행기를 끝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은 남아있었지만, 행동이 수반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큰 다짐이 필요한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귀찮아했을까.
콜마르를 떠난 내가 도착한 곳은 독일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콜마르에서 떠날 때 다음은 어디로 갈까를 두고 고민한 끝에,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와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두 곳에 카우치서핑 리퀘스트를 보내 두고, 먼저 받아준다는 쪽으로 가기로 했다. 내심 계속되는 프랑스 여행 - 호스텔을 정말 찾아보기 힘든 - 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나로서는 내심 독일 쪽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런 기도가 통한 것일까. 프라이부르크에서 카우치서핑을 받아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나는 홀가분하게 하울의 도시 콜마르와 작별을 할 수 있었다.
나를 받아준 호스트는 프라이부르크의 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 분이셨다. 저녁이 되자 자기 친구들과 함께 피크닉을 나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주셨고,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외국 유학생들의 피크닉이 궁금했기에 한 번 가보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위의 사진. 사실 피크닉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었고, 그냥 잔디밭에 앉아서 기타 튕기면서 노래도 부르고, 술 마시고, 수다 떠는 것이었다. 그동안 영어를 쓸 일이 정말 거의 없었던 나로서도 어느 정도 영어를 쓸 수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는 굉장히 반가웠다. 주위의 사람들도 이런 여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는 분위기여서 만리타향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처음으로 만난 것이었는데도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이 되고, 본격적으로 프라이부르크의 시내 관광을 시작하게 되었다. 프라이부르크는 친환경 생태도시로도 유명한 곳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돌아다니다 보면 과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푸른 잔디의 융단이 깔린 철로가 굉장히 신비로워 보였다. 흔히 '철로'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회색 시멘트 바닥과는 영 딴판이었다.
콜마르에 이어, 프라이부르크에서도 날씨는 좋았기에 나는 걷는 편을 택했다. 이런 나의 선택에 박수라도 쳐주듯 프라이부르크는 여러 풍경으로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중에 가장 멋졌던 것은 독특한 초록 지붕이 인상적이었던 예수 성심 교회. 왠지 레고를 연상시키는 설계여서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런 프라이부르크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점이 하나 있었다. 아침을 안 먹고 나왔었기에, 허기도 달랠 겸 프라이부르크 중앙역에 있는 슈퍼로 들어가 뭐라도 사려고 들어갔을 때였다. 그때 나는 손에 카메라를 들고 다니고 있었는데, 슈퍼의 어떤 직원이 그걸 보더니 나에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라는 듯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뭐 어떻게 하라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카메라를 들어 올려 보였는데, 갑자기 그 카메라 렌즈 방향에 있던 흑인 여직원이 와서는 왜 자신을 도촬 하냐(...)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가 막혀서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저 직원이 손짓으로 뭐라고 하길래 그냥 얼떨결에 따라 했던 거다. 정 찝찝하면 씨씨티비를 확인해보던가, 아니면 내 카메라를 확인해보면 되지 않겠느냐, 하면서 막 쏘아댔다. 멀쩡한 사람을 소라넷 회원처럼 몰아가는 게 정말 불쾌했는데, 왠지 모르게 흥분하니까 영어가 잘 나왔던 것 같다ㅋㅋㅋ. 그러자 그 흑인 여직원도 좀 당황한 듯 알았다, 미안하다, 하며 넘어갔다. 약 3개월간 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종차별이나 놀림은 한 번도 안 받아봤는데, 유일하게 불쾌했던 기억이 바로 프라이부르크에서 생길 줄이야.
지금에야 웃으면서 쓸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정말 엄청나게 불쾌했었기에 결국 그 슈퍼에선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왔다. 배고픈 것도 까먹었고, 잘못하면 먼 외국에서 성범죄자로 몰릴 뻔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관광은 해야 했고, 프라이부르크 시내로 들어섰다. 기껏해야 콜마르와 비슷하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프라이부르크는 상당히 큰 도시였다. 물론 그렇다고 볼거리가 많은 동네는 아니었다. 콜마르와 비슷하게, 도시의 분위기가 매력적인 도시라고 하는 편이 더 알맞을 것이다.
프라이부르크가 환경도시로 꼽히는 데에는 친환경적인 발전 방식뿐만 아니라 도시 조경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딜 가나, 말 그대로 사람이 많은 곳을 가나 적은 곳을 가나 바닥에 쓰레기 한 점 없이 깨끗했다. 프라이부르크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라이부르크가 매력적인 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길을 걷다 보니, 프라이부르크 대성당 앞에 시장이 열려있었다. 시장도 시장이지만, 그 주변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건물들이 알록달록한 색깔이 햇빛 아래서 빛나는 것 같아서 더 멋졌던 것 같다. 시장에서는 꽤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는데, 목공예품이 많았던 게 새로웠다. 목공예품이라고는 해도 대부분 애들 장난감이기는 했지만,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보다 훨씬 정감이 가서 좋았다.
시장 구경을 좋아하는 편이라 국내에서도, 이 여행에서도 가는 곳마다 시장이 있으면 늘 둘러봤던 편인데 이렇게 활기차고 사람 많은 시장은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시장 이후로 처음 보는 듯했다. 규모도 상당히 컸고, 신기한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열지는 않는 듯했다. 해 질 녘이 되어서 다시 구경하러 가봤더니 그때는 장사를 다 접었더라. 한국 시장은 저녁부터가 본 게임인데!
시내 구경을 다 끝내고 나서, 카우치서핑 호스트가 돌아온다고 한 시간까지는 한참이나 남아있었으므로 좀 더 교외로 나가보기로 했다. 사실 프라이부르크 - 슈투트 가르드에 이르는 독일 남서부 지역은 검은 숲(슈바르츠발트, Schwarzwald)라고 불리는 울창한 숲지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인지라, 프라이부르크를 방문하고 싶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검은 숲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검은 숲임'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만큼 딱 정해진 지대가 아닌 데다가 본격적으로 보려면 꽤 멀리 나가야 했으므로, 그냥 가다가 울창한 숲지대가 보이면 검은 숲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ㅎ.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더 이상은 못 가겠다! 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햇살은 쨍쨍했고, 더 이상 갔다가는 돌아오기도 힘들 것 같았기에 그냥 '내가 본 데가 검은 숲임 암튼 검은 숲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경험이 쌓여갈수록 유럽 여행은 렌터카나 자가용이 있으면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편하게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자전거라도 있었다면!
돌아오는 길에는 공동묘지를 지나왔다. 공동묘지라고는 해도 음산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물론 날씨 덕이 크겠지만, 단정하게 정돈된 길과 잔디, 말끔한 비석들이 교외에 자리 잡은 공동묘지는 관리도 잘 안 되고 있을 거라는 편견을 없애주는 듯했다. 예전에 해봤던 녹스(NOX)라는 RPG 게임에서 봤던 좀비와 해골이 기어 나오는 공동묘지 탓에 생긴 편견이기는 하다ㅎㅎ. 우리나라와 매장의 형태가 다른 것도 신기했다. 이 곳의 매장은 묘비 앞에 네모난 꼴로 묫자리를 파고 매장한 뒤, 그 위에 흙을 덮고 잔디나 꽃을 덮는 형태였다. 패키지여행이나 일정을 정해두고 하는 여행이었다면 이런 공동묘지는 절대 와볼 일 없었을 텐데, 그냥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것도 다 보는구나, 싶어서 조금 기분이 좋았다.
다시 시내로 돌아왔고, 해는 여전히 중천이었다. 그러고 보니 프라이부르크를 돌아다니면서 콜마르와 비슷한 스타일의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일대가 바로 그 유명한 알자스 - 로렌 지방이기 때문이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등장하는 바로 그 지역인데, 한 마디로 정리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지역이다. 기후도 온난하고, 유럽 중에서도 날씨가 온화하여 살기도 좋다고 한다. 어쩐지, 햇살이 이렇게 쨍쨍하더라니.
아까 시장이 열렸던 곳, 그러니까 대성당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북적북적했던 시장이 열린 곳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신기했다. 참고로 쌍심지를 세우고 있는 저 빨간 건물은 옛 시장 공관인데, 유럽의 중세에는 항상 도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당과 시청을 도시 중앙에 배치하고 광장을 두었던 듯하다. 중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겠다.
슬슬 해가 떨어지고 있었고, 돌아갈 때가 되고 있었다. 중세와 환경, 녹색이 아름답게 어우러져있던 도시 프라이부르크도 저녁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 여행은 내일도 계속된다. 내일은 호스트의 추천으로 호수가 아름다운 도시, 프라이부르크 인근의 티티제(Titise)라는 곳으로 떠난다. 과연 어떤 풍광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