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 브뤼셀
브뤼헤에서의 짧았던 일정을 뒤로하고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로 향했다. 떠나기 전날의 날씨가 유난히 꾸물꾸물해서 비 맞으며 이동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침이 되니 날이 밝았다. 브뤼'헤'에서 브뤼'셀'까지는 기차로 대략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글을 쓰면서 새삼 생각해보면 내가 유럽 여행을 할 때만큼 단기간 내에 기차를 많이 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유럽에서 단-중-장거리 가리지 않고 가장 합리적인 가격으로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기차이기도 하고, 기차 노선이 꽤 촘촘한 편이라 어디든지 가기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이후 영국으로 가면서 산산이 깨지게 되는데 그건 나중의 이야기.
브뤼셀의 숙소는 시설은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입지가 좋은 편이었다. 먹거리를 살 수 있는 마트도 가까웠고, 무엇보다도 지하철 역이 바로 코앞이었기 때문. 하지만 걸어가도 될법한 거리였기 때문에 한 번 걸어가 보기로 했다. 외국에서는 걷다 보면 그네들에게는 익숙할지 몰라도 나 같은 이방인에게는 정말 생소한 것들을 마주칠 수 있기 때문. 그중에 하나가 공중화장실이었다. 사진을 찍어놓지 않아서 정말 아까운데, 길을 가다 보니 S자 모양의 구조물이 있는 거다. 이게 왜 여기 서 있나, 했더니 S자의 휘어진 부분 안을 보니 소변기가 달려있더라. 공중화장실이었던 거다. 생전 처음 보는 형식의 공중화장실에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걷다 보니 목이 말라서 대형 마트(아마도 까르푸였던 것 같다)에 들어가 보니, 초밥을 팔고 있었다. 2개월을 넘어가던 타지 생활에 밥이 고팠던 나로서는 당장이라도 사 먹고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영 아니었다. 보시다시피 가격도 비싼 편이고, 대부분이 야채 김말이이거나, 기껏해야 계란, 새우, 연어처럼 서양인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재료로만 만든 초밥뿐이었다. 사 먹을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과감히 패스.
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벨기에의 상징이자 브뤼셀의 상징인 '오줌 싸는 소년' 상이 보인다. 그런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꽤 작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았다. 브뤼셀의 명물이니 보러 오기는 했다만, 금은보화로 장식해 엄청 휘황찬란한 것도 아니고, 조형미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엄청 큰 것도 아니고... 왜 이런 오줌 싸는 소년의 모습을 조각한 동상이 그렇게 인기를 끌고 랜드마크까지 된 것일까? 유래가 궁금해 찾아보니 어느 것도 확실하진 않은 모양. 어쩌면 그래서 랜드마크가 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태평히 오줌을 싸는 소년의 동상을 보면 왠지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유래는 그다지 상관이 없었을지도.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는 벨기에의 상징 중 하나인 와플을 팔고 있었다. 달다구리한 빵 + 과일 + 생크림 + 시럽 + α이니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다. 과연 맛있다. 단 두 개는 질릴 것 같다. 애초에 단 걸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아서 하나면 충분했다. 벨기에, 그중에서도 브뤼셀은 특히나 '단 맛'에 특화되어 있는 곳이다. 와플은 물론이고 초콜릿, 마카롱 등의 과자가 즐비하다. 단 걸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브뤼셀에선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드실 수도 있으실 것이다.
조금 더 걸어가면 또다시 브뤼셀의 심장이자 상징인 '그랑 플라스'를 만날 수 있다. 탁 트인 광장, 그 주위를 둘러싸는 시청사, 길드하우스 등 각양각색의 건물들. 돌이켜보면 이 곳 그랑플라스는 아마도 내가 가 봤던 장소들 중에서 가장 '유럽다운' 느낌을 주는 곳이 아니었나 싶다. 맑은 하늘과 시간의 흐름이 무색한, 예쁜 중세풍 건물들의 조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중앙에 서서 한 바퀴 돌아보고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나는 2개월 동안 유럽을 돌아다니느라 왠지 거기가 다 거기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그랑 플라스는 그런 느낌을 산뜻하게 씻어주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브뤼셀의 시민들에게는 과거이자 현재인 그랑 플라스를 빠져나온다. 시간이 어느덧 꽤 지나서인지 배가 고팠지만 다음 일정을 위해 대충 때우기로 했다. 다음 일정은 벨기에의 만화 박물관. 벨기에가 만화가 유명한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도 있으실 법 한데, 벨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만화 중 하나인 '땡땡의 모험'이 나온 국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된 적이 있어 아시는 분도 있으실 것이다.
그런고로 벨기에에서 땡땡은 우리나라에서 둘리+호돌이+수호랑을 모두 합친 것 이상의 인지도와 인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위의 사진과 같이 브뤼셀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땡땡의 모험'의 포스터나 피규어를 파는 가게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값이 꽤 나가는 편이다. 어쨌든 이 땡땡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 브뤼셀의 만화 박물관을 향해 간다.
걷다 보니 뜻밖의 장소를 마주쳤다. 왼쪽의 건물은 그 외양에서는 쉽사리 짐작을 할 수 없지만 브뤼셀의 증권거래소인데, 그 앞으로 펼쳐진 광장에는 2016년 3월 22일(내가 유럽 여행을 떠난 지 불과 다음날이다!)에 벌어진 브뤼셀 테러 사건을 기리는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요즘은 조금 잠잠해진 것 같지만, 이 당시만 해도 유럽 도처에서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브뤼셀 지하철 역사 내에 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테고.
이런 현장을 마주치면 언제나 할 말을 잃게 된다. 근현대사 속의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누적되어서 현대에 터져 나온 일어나서는 안 될 일. 그리고 그것을 되새기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 2014년, 세월호의 비극을 겪었던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을 추모하는 장소가 유난히 더 아팠다.
만화박물관은 사실 기대했던 것만큼 볼거리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언어 지원 서비스도 다소 빈약해서 말 그대로 정말 할 일 없으면 가는 곳 정도의 느낌. 사실 벨기에가 만화로는 좀 잔뼈가 굵다고 해도 일본 및 미국 만화에 더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영 생소한지라.
생각해보니 스머프도 벨기에 만화였던 점은 다소 의외였다. 어렸을 때 즐겨봤던 파란 피부의 스머프는 벨기에의 '페요'라는 작가의 만화로, 원제(原題)는 '레 슈트룸프(Les Schtroumpfs)'. 우리가 알고 있는 '스머프'라는 제목은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렸을 때 숲 속에서 살면서 맨날 놀고 먹는 스머프의 생활이 굉장히 낭만적으로 보였는데, 다 큰 후에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는 후일담.
짧았던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저녁 식사 때가 다가와 나를 붙잡고 벨기에 요리와 벨기에 맥주가 싸다며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사실 벨기에 요리의 핵심 재료가 '홍합'인데, '이걸 굳이 여기서 이 돈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요리들이었다. 대표적인 게 홍합탕. 사실 벨기에식 홍합탕이라고 이야기하면 말이야 거창해보이지만 그냥 홍합 술찜이다. 앞으로도 1개월이나 더 여행을 해야 하는 여행자가 고르기엔 구미가 당기지 않는 가격과 레시피에 발걸음을 돌렸다.
회색과 하늘색이 교차하는 하늘 아래의 그랑 플라세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운데 철퍼덕 주저앉아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누군가는 나처럼 사진을 찍으며 자신이 있었던 시간의 그랑 플라세를 기록하고, 이 곳이 일상인 누군가는 그런 관광객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매일 보는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 찍어대는 걸 신기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모두 역시 이 날이 지나고, 또 여러 날이 지나면 이 곳을 흘러가듯 떠나가겠지. 오늘이면 이 곳을 떠나 안트베르펜(Antwerp)로 떠나게 될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