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런던에서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물론 이전에 다룬 십스미스와 비피터만 방문한 것은 아니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는 헀지만, 그런 내용은 추후에 B사이드에서 다루기로 하자. 아무튼 이제 슬슬 이 여행을 떠난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으로 향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코틀랜드다. 아마도 지금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내가 방문했던 곳 중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 될 그 곳은 역사와 전설, 그리고 위스키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마도 위스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발을 디디기를 바라는 곳이 아닐까.
런던에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가는 방법은 크게 3가지가 있다. 비행기, 기차, 그리고 버스다. 지금까지 내 여행기를 읽으셨던 분이시라면 이번에도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아실 것이다. 유럽 대륙 내에서는 기차의 가격이 매우 저렴한 편이었는데(왠지 독일은 비쌌지만), 영국의 기차값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버스다. 몇시에 어떤 차편을 타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런던에서 에딘버러까지 버스로 가는 데에는 보통 10시간 남짓이 소요된다(차편에 따라서는 20시간까지 걸리는 것도 있다). 지금까지 포르투-마드리드, 세비야-발렌시아, 안트베르펜-파리 등의 길고도 험난한 시간을 견뎌왔던 내 허리와 엉덩이가 다시 한 번 견뎌주기를 바라며, 나는 에딘버러로 향하는 버스표를 예매했다.
우여곡절 끝에 에딘버러에 도착해 짐을 풀고 밖으로 나서니, 에딘버러의 상징이자 나아가서는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에딘버러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색창연한 모습이 왠지 탑만 빠진 호그와트 성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에딘버러 성은 가장 오래된 건물이 12세기쯤에 지어졌을 정도로 굉장히 오래된 건물이다. 보시다시피 굉장히 언덕에 있는지라 올라가기가 번거롭기는 하지만, 에딘버러 여행은 이 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 앞의 광장에서 여러 행사가 열리기도 하고, 이 주변에 기념품 상점 및 여러 장소가 모여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에도 킬트를 입은 분들이 모여서 백파이프를 불기도 했다.
그리고 이 에딘버러 성의 근처에 바로 나의 목적지였던 'The Scotch Whisky Experience'가 있다. 우리말로 대충 번역하자면 '스카치 위스키 체험 센터(?)' 정도가 되는데, 말 그대로 스카치 위스키의 제조법을 설명하는 간단한 전시물과 스코틀랜드 전역의 위스키들을 판매하고, 지하에는 스카치 위스키 바(Bar)까지 있는, 말 그대로 스카치 위스키 종합 선물세트같은 느낌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애주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광경이 펼쳐진다. 앞서 말했듯 스코틀랜드 전역의 위스키가 줄줄이 들어서있는 것. 상대적으로 희귀한 위스키까지도 잘 구비를 해둔 듯 했다. 대부분은 마셔보지는 못했어도 어깨 너머로 이름은 들어본 녀석들이었는데, 여기 와서 처음 본 녀석들도 상당히 많았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시스템이 있었다. 스카치 위스키들의 맛을 나눠두고, 아래의 버튼을 누르면 거기에 해당되는 위스키가 어떤 건지 불이 들어오는 식이다. 물론 스코틀랜드 에딘버러까지 올 정도면 위스키도 어느 정도 마셔보고 위스키에 관한 자신의 취향이 어느 정도 확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서도, 생판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이런 시스템은 굉장히 좋을 것 같았다. 이런 점은 나중에 우리나라도 전통주에 관한 홍보관을 차릴 때 어느 정도 벤치마킹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인상적이었던 점은 위스키 관련 상품(?)들. 차갑게 칠링해서 온더락 얼음 대용으로 넣는 진짜 돌(...)이나 위스키에 타먹는 물. 그냥 물이 아니고 싱글몰트 위스키가 생산되는 스코틀랜드 각 지방(크게 나누면 6가지: 하이랜드, 로우랜드, 캠벨타운, 스페이사이드, 아일레이, 기타 섬 지역)의 물이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즐길 때는 가볍게 물 한두 방울을 타서 향과 맛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 때 아무 물이나 타지 말고 그 싱글몰트가 생산된 지방의 물을 타서 먹으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차이를 아는 절대미각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이 정도로 집념 있게 위스키를 즐기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또 각 지방의 위스키를 넣은 초콜릿도 있었다. 기념품으로 사가고 싶었으나 당연히 녹아서 줄줄 흐를 것이기에 사오지 못했다. 흑흑.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면 거의 모든 스카치 위스키를 마셔볼 수 있는 바(Bar)가 있다. 아마 위스키 러버라면 바의 정면에 펼쳐지는 광경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지도. 대성당의 파사드 못지 않은 황홀경이 펼쳐져있기 때문이다. 흔히 만나볼 수 있는 블렌디드 또는 블렌디드 몰트부터 한국에선 보기도 어려운 싱글몰트까지 모두 만나볼 수 있었다.
위스키(Whisky)라는 말은 과거 스코틀랜드 언어인 게일어 '우스게 바하(Uisge beath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뜻은 생명수. 왜 생명의 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곡식의 생명의 정수를 뽑아내서 만들어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고, 과거에는 증류주가 약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유야 아무려면 어찌 됐든, 한국에서부터 이 술을 찾아서 여기까지 온 나에게 위스키는 정말 생명수였다.
목을 짜르르 떨리게 만드는 글렌파클라스 105, 부드럽게 감싸안는 듯한 맥캘란, 아일라 섬의 거센 풍랑이 떠오르는 라프로익, 그리고 산속에서 마주친 사슴처럼 신비한 달모어까지. 에딘버러에서의 첫날밤은 위스키란 이름 아래 묶인 천의 얼굴들이 보여주는 매력에 흠뻑 젖은 채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