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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리스트: 시인으로 등단하기

시인 OOO 가 되고 싶었다.

by 짧아진 텔로미어

버킷리스트: 시인으로 등단하기


이전에 등단에 관하여 글을 쓴적이 있다.

등단에 대하여


나는 여러 종류의 잡다한 글을 쓴다. 유치한 상상력으로 소설 흉내를 내보기도 하고

살면서 지나온 어려운 시절을 진지한 에세이로 써보기도 했다. 그리고 시를 쓰기도 했다.

잡다하게 쓴다는 건, 어느 한 가지에도 능숙하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시다.

짧은 구절에 많은 의미를 숨길 수 있고, 읽는 이마다 다른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한 나는 깊이를 갖춘 문장이나 고급스러운 어휘를 다루는 능력은 없다.

그래서 나의 글이 어느 정도의 깊이를 가질 거라는 기대 역시 하지 않는다.


나는 짧은 시를 좋아한다.

간결한 문장 속에 다층의 의미가 숨어 있는, 그런 시.

난해함을 앞세운 시보다는 누구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를 선호한다.

처음 시를 끄적이던 때에는 시라고 말하기 민망한 글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시인OOO 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꿈도 꾸곤 했다.

글을 쓰기 전에는 등단에 대해선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와는 먼 세상의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시를 쓰기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서 부터

여러 공모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력은 부족하면서도 ㅅㄱ 신인상, ㅁㅎㄷㄴ 신인상, 직장인 신춘문예까지.

지금 돌이켜 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정확했다.


수상작들을 읽으며 깨달았다. 나처럼 짧고 평범한 문장으로는 통하지 않겠구나.

그래서 한동안은 문장을 길게 하고 더 낯선 구절을 추가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쓴 몇 편을 모아 ㅁㅎㄱㅇ 이라는 계간지의 시부문 신인상에 응모했고

뜻밖에도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앞서 쓴 바와 같다.


그때 응모한 다섯 편 가운데 세 편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형식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쓰고 싶은 시는 길지 않고

어렵지 않으며 마음에 곧장 닿는 시다.

하지만 그런 시로는 등단이 쉽지 않다는 현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버킷리스트였던 '시인 등단'은 잠시 옆으로 두고, 몇년 후 은퇴 기념으로 지금 쓰는

시들을 모아 자비로 시집을 내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물론, 언젠가 시 쓰기의 내공이 더 쌓이면 다시 도전해볼 생각은 남아 있다.


아래 시들은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던 3편의 시이다



무사히 망가졌습니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의자를 낮추는 일이다.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묵묵히 일어나는 붕괴를 받아 적는 일.


매일 몸의 한 조각을 꺼내 식탁 위에 올린다.

눈물보다 오래 증류된 하루가 짭짤하게 농축된 시간.

아이들은 다른 방을 향해 자라고,

나는 벽돌을 쌓아 스스로 쉴 수 없는 마음을 만든다.

현관 앞 신발은 서로를 오해한 채 놓였다. 어긋난 발끝만큼 굽이 닳은 거리감.


마음에는 켈로이드 같은 상처가 자라고, 약 봉투는 하루를 나누는 시간표가 된다.

이른 아침, 점심, 저녁. 식후 30분. 그 시간에만 정확해지는 나의 존재감.


숨을 고른다는 건 타인의 호흡을 먼저 읽는 일.

간병이라는 말은, 간(肝)을 쓰는 일일지도 모른다.

윤리란, 때로 자기 파괴를 수선하는 테이프.


문득 내 이름을 세탁기에 돌리고 싶어진다.

너무 오래 써서, 향기 하나 없이 때가 탄 이름.

‘家長’


감정은 짜지 않고 털어 말린다.

이제 눈이 아니라 뼈의 위치를 읽는다.

식탁에 꺼내 하나씩 비워진 자리의 공허를 읽는다.

나를 닮는다는 건 속이 비었다는 뜻이고,

무릎이 아파진다는 뜻이며, 침묵이 길어진다는 뜻이다.


말하면 무너질까 봐, 말하지 않으면 사라질까 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주 다치고 돌아오는 이름은 무사히 망가졌다는 뜻이다.

지금도 여기 있다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증거 같은 것.


팔꿈치의 무게에 눌린 식탁이 기운다.

기운 눈빛이 묻는다. 오늘의 나는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나를 사등분한다. 아내, 자식, 부모, 나.

점차 얇아지는 나.


가끔 울고 싶다는 건

줄어든 내 몸에 더 이상 감정이 없다는 뜻이다.


그건 이름이 세탁된 가장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분재, 아픔의 은어(隱語)


다듬는다는 건 절단을 의미한다.

자라는 법보다 자라는 선(線)에 먼저 길들여진 생.

형태를 조건으로 살아지는 목숨.

살아 있는 감각과 자람은 무관해 자라지 않는 형태로 타협한 방식.

선을 벗어난 시선부터 잘린 후 팔을 뻗기 전부터 꿈은 칼날이 된다.

햇빛은 모든 생에 공평하지 않다.

잎은 익숙한 빛을 잊고, 낯선 흙의 체온에만 귀 기울인다.

빛의 방향을 묻지 않는 잎은 체념으로 무성했다.

방향이 서로 다른 잎맥은

말이 되기 전 열망, 곧게 자라지 못한 생의 서술 같은 것.

뻗고 싶던 갈망이 옹이마다 갇혔다.

살아남은 가지에는 옆으로 굽은 설득의 흔적만 남았다.

수형(樹形)이라는 굴레에 꺾인 고통은 이제 숲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때 숲이었을 모양이 곡됐다.

'자르다'가 '자라다'를 잠식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물을 주는 손과 가지 치는 손은 다르지 않았다.

바람이 형벌처럼 불고 칭찬은 항상 절단 이후에 왔다.

굽은 생이 아름답다 말.

빛이 격자무늬로 들이치는 방에서 그 말을 오래 삼켰다.

흔들리는 건 여백의 사치, 흔들리지 않기로 한다.

살아남는 건

대개 아프다는 뜻이다.

아름다움, 그건 아픔의 은어(隱語)다.




누에의 말


다섯 번째 밤.

다섯 번의 탈피(脫皮).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몸 안에 실이 웃자다.


팔다리 묶고

검게 퇴화된 날갯죽지 그늘 안으로 접으면

마침표 부재인 감정이

고치를 을 시간.


고치는

문장이 되지 못한 채 목에 걸린 .

굳은 껍질 틈으로 터져 나온 날개 말려 펴본다.


‘등에 붙은 건 날개지만

하늘이 없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혼잣말처럼 가늘게 누에의 말을 번역한다.


문장 속 여백을 씹어도

나는 나를 번역하지 못했다.

말은 너무 작아 지워지고, 너무 커 읽히지 않았다.


떠오름은 무너짐의 다른 방식.

날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이토록 길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아닌 그림자에게 처음 말했다.


나는 누에의 입을 가지고 말로 고치를 짓는 사람.


고치를 짓는 누에,

벽을 세우는 나.

둘 다 안쪽에서만 만든다.


누에는 다섯 번, 나는 셀 수 없이 껍질을 벗었다.

탈피라는 말에는 껍질이 없다.

다섯 번 벗은 몸이 있다.




사진: UnsplashTo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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