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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거대한 輪

by 마르치아





삶은 하나의 거대한 바퀴다. 어떤 때는 확장이라는 전진으로 힘차게 나아가며 세상 밖으로 뻗어야 할 때가 있고 또 어떤 때는 그 모든 것을 거두어 들이며 조용히 수렴해야 할 때가 있다. 하나의 거대한 바퀴를 몰고 가면서 전진과 멈춤 그리고 때로는 후진까지도 모두 감내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삶의 숙명이다.

확장의 시기에는 봄의 새싹이 언 땅을 뚫고 나오듯 안에서부터 차오르는 힘찬 기운이 있다. 사람이 자연스레 넓어지고 인맥도 늘어나고 활동의 영역 또한 경계 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그 시기에는 사람들을 유독 많이 관계하게 된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조차 어디론가 이어질 것만 같고 만남이 곧 확장의 증거처럼 느껴진다. 모든 인연에 의미를 두기 시작하고 이미 떠난 인연에게조차 알 수 없는 집착이 생긴다. 확장의 시기에는 사람 하나 말 한마디 스친 눈빛까지도 마치 운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장은 언제나 결실과 함께 끝이 난다. 확장과 결실을 맛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칫하게 되면 인생은 또 한 번의 계절을 맞게 된다. 익숙하던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자연스레 새로운 인간관계의 자리에 다시 놓이게 된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인생의 계절이 바뀌어 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다. 모든 것이 숙명처럼 내 의지 밖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것을. 억지로 잡아두려 했던 것들조차 사실은 이미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가 열어두지 않은 문들마저 언젠가 스스로 열리기 마련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은 이때 한 번의 절망과 어쩔 수 없는 한숨을 내뱉게 된다. 그 한숨은 누구를 탓하는 숨이 아니라 변해버린 계절 앞에서 스스로를 내려놓는 숨이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잠시 멈춰 서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체념의 숨이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거대한 바퀴 위에 이미 올라탄 이상 우리는 이 흐름을 멎게 할 수 없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고 뒤로 가고 싶어도 뒤로 갈 수 없으며 이 바퀴는 우리 안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음 계절로 다음 장면으로 다음 길목으로 조용히 굴러간다.




지금의 장면은 어느새 뒤로 밀려나고 우리는 알지 못하는 새 길목에 조용히 놓이게 된다. 막을 내린 줄도 몰랐던 순간이 이미 사라져 있고 열렸는지도 모른 채 새로운 무대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몇 번의 길에서 몇 번의 무대에서 우리는 주연으로 살아낸다. 그러다 또 어떤 순간에는 조용히 조연의 자리에 물러나게 된다. 찬란히 비추던 조명이 서서히 멀어지고 다른 이의 얼굴에 빛이 옮겨 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인생의 무대에서 주연과 조연은 각자의 때와 순서가 있을 뿐 가치의 높낮이는 아니라는 것을.





한때는 내가 중심이었던 자리에서 이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받쳐주는 사람이 되고 한때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가 또 한때에는 누군가의 박수 속에서 조용히 뒤돌아 나오는 사람이 된다. 그 굴레를 몇 번이나 오르내리다 보면 화려함과 초라함이라는 말이 얼마나 덧없고 애매한 것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몇 번의 그 굴레를 몸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겪고 또 겪다 보면 인생은 결국 하나의 커다란 챗바퀴에 불과하다는 서늘한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앞서가도 뒤처져도 한 바퀴를 돌아오면 다시 제자리와 닿아 있는 구조.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희망도 절망도 모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손님이라는 사실을 늦게서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그때 비로소 챗바퀴라는 말의 반대편에 숨겨진 의미도 발견한다. 똑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는 같은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나 조금은 달라진 마음을 가지고 조금은 깊어진 눈으로 조금은 부드러워진 태도로 다시 제자리와 닿는다. 바퀴는 똑같이 돌지만 바퀴 위에 서 있는 나는 이미 다른 내가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인생은 지금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는 걸까. 확장도 수렴도 모두 지나온 뒤에 남은 이 고요는 봄을 준비하는 겨울인지 여름의 열기를 식히는 가을인지 혹은 계절의 이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기류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바람의 결이 바뀌고 있다는 것, 내 마음의 깊숙한 곳에서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작은 떨림이 있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히 느끼고 있다.




계절이, 그리고 시간이, 그리고 인연이라는 이름의 모든 순간이 결국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건네는 선생이다. 꽃이 피었다 지는 일, 사람이 다가왔다 멀어지는 일, 시간이 흘러가며 얼굴의 결을 바꾸는 일, 그 모든 변화 속에서 우리는 배운다. 머리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겪어내며 잃어내며 다시 얻어내며 조용히 배워 나간다.

젊을 때의 확장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서 시작되지만 나이가 들어서의 확장은 무엇을 더 이상 쥐지 않아도 괜찮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젊을 때의 수렴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물 섞인 저항이지만 나이가 들어서의 수렴은 이제는 비워야 다음 것이 들어온다는 어렴풋한 믿음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삶의 바퀴는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고리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성장시키는 학교이기도 하다. 버거운 날에야 비로소 나에게 필요 없는 관계를 알게 되고 고독한 밤에야 비로소 정말 곁에 두어야 할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풍요의 계절에는 내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착각하기 쉽고 결핍의 계절에는 내가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 뼈저리게 알게 된다. 둘 다 지나고 나서야 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저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확장의 시기에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고 수렴의 시기에는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보내준다. 그 두 장면을 다 겪어본 사람만이 비로소 누군가의 곁에 오래 머물 자격을 얻는다. 인생의 바퀴가 또 한 번 돌아 지금의 나를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려 할 때 우리는 문득 두려워진다. 그러나 그 두려움 속에서도 한 가지는 이미 알고 있다. 이 길의 어느 지점에서 나는 또다시 웃게 될 것이고 또다시 울게 될 것이며 또다시 누군가를 보내고 또다시 누군가를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바퀴를 멈추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퀴 위에서 어떤 마음으로 설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인지도 모른다. 확장의 계절에는 흥청거림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연습을 하고 수렴의 계절에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애써 붙잡지 않는 연습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우리는 깨닫게 된다. 삶은 거대한 바퀴이지만 그 바퀴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철저히 나의 몫이라는 것을. 같은 계절을 겪어도 어떤 이는 상처만 남기고 떠나고 어떤 이는 감사만 남기고 떠난다. 같은 무대에 올라서도 어떤 이는 박수의 숫자만 세다가 내려오고 어떤 이는 단 한 사람의 눈빛을 품고 내려온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이 바퀴 위에 서 있을 것인가. 확장의 계절에 누구를 향해 팔을 벌릴 것인가. 수렴의 계절에 무엇을 품에 안고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계절은, 시간은, 인연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 질문에 서툴게라도 답해 나가는 과정이 어쩌면 한 인간이 자기 삶을 책임지는 방식일 것이다.

오늘도 바퀴는 돌아간다. 어제의 나를 지나 내일의 나를 향해. 나는 잠시 이 바퀴 위에서 숨을 골라 본다.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 돌아보면 또 하나의 계절이었음을 알게 되겠지. 그때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의 나를 조용히 다독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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