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계속 쓰는 이유.
어쩌면 나는 문장으로 뜨거운 나를 식히고 또 차가운 나를 데피며 사는 중이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문장으로 나를 살리고 문장으로 나를 묻는다. 마음이 불길처럼 타오르던 시절 나는 그 불을 끄려고 글을 썼고 그 불이 꺼지고 난 뒤 남아 있던 잿더미는 생각보다 더 깊고 차갑고 어두웠다. 나는 그 잿더미를 손으로 헤집으며 그 안에 아직 미약하게 살아 있는 나의 조각들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내 손끝에 닿던 것은 대부분 이미 온기를 잃고 식어버린 마음의 조각들이었다. 그때 알았다.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나를 다시 조립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글이라는 도구가 없으면 내 안의 부서진 조각들이 서로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끝내 흩어져 버린다는 것을.
사람들은 뜨거운 감정이 무섭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차가운 감정이 더 무서웠다. 뜨거움은 그래도 나를 태워서라도 흔적을 남기지만 차가움은 나를 무너뜨리지도 못한 채 그냥 비워버린다. 뜨거운 상처는 고통 속에서라도 버티지만 차가운 상처는 고통조차 남기지 않은 채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차갑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멈추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정지의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다. 숨이 쉬어지는데도 살아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상황. 심장이 뛰는데도 그 박동이 나의 것 같지 않은 상황. 한동안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인지 혹은 이미 내 안의 일부는 죽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했다. 그때 글이 나를 깨웠다. 글자는 작은 망치처럼 얼어붙은 가슴을 두드렸고 문장은 온기를 서서히 스며들게 했다. 나는 글을 쓰며 겨우겨우 살아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글을 쓰면 나아지느냐고. 그러나 나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어딘가 멀리서 단단한 유리가 금 가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나아진다는 말은 마치 상처가 다 아물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내 상처는 늘 어느 정도 살아 있고 어느 정도는 썩어 있고 어느 정도는 다시 덧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글을 쓰면 겨우 숨을 붙인다. 글을 쓰면 조금 덜 죽는다. 그것이면 충분한 날들이 있었다.
살아보니 마음이라는 것은 계절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 있다. 계절은 사람을 배려하지 않아도 자연의 리듬대로 움직이지만 마음은 리듬을 잃어버리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을 끌고 다닌 적이 있다. 봄이어야 할 때 봄이 오지 않고 여름이어야 할 때 마음이 얼어붙고 가을이어야 할 때 지나친 열에 짓눌려버린 날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나라는 존재가 자연과도 어긋나고 시간과도 어긋나고 삶이라는 길 전체와도 어긋난다고 느꼈다. 그런 어긋남을 붙들고 살아야 했고 그 붙들림이 너무 뜨거울 때도 너무 차가울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글은 나의 온도계를 대신해주고 나의 계절을 대신 기록해주고 나의 시간을 대신 정리해 준다.
내 글은 때로 잔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잔인하다는 말에 상처받지 않는다. 세상이 먼저 나에게 잔인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받은 잔인함도 있었고 삶의 무게에서 비롯된 잔인함도 있었고 나 자신에게 가한 잔인함도 있었다. 나는 그 잔인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외면하면 그 잔인함은 나를 향해 더 큰 칼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나는 글로 잔인함을 해부한다. 글로 잔인함을 마주한다. 글로 잔인함의 모양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래야만 그 잔인함이 더 이상 나를 제멋대로 흔들지 않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날들이 있었다. 버려진 마음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정리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어두운 골짜기로 굴러 떨어져 쌓이기만 하던 기억들이 있었다. 나는 그 기억들을 오랫동안 무덤처럼 가슴속에 방치해 두었고 그 무덤에서는 여름에도 찬 기운이 올라왔다.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죽이고 숨을 멈췄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무덤을 파헤쳐 빛을 들이대는 일과도 같았다. 그 속에 묻혀 있는 모든 나의 작은 조각들 어린 날의 나 포기했던 나 살아남으려고 울다가 잠든 나 그런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헹구고 다시 묻어주는 일. 어둡고 힘들고 때로는 잔혹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작업을 하지 않으면 나는 자꾸 썩어갔다. 나는 내 안의 썩음이 바깥으로 번져 나를 좀먹는 것을 그대로 두고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빛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둠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희망이라는 단어가 너무 멀게 느껴질 때조차 글은 나를 붙잡는 마지막 끈이었다. 나는 글로 남는다. 내가 살아 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글을 남긴다. 아무도 몰라도 된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된다. 먼저 살아야 할 사람은 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 글에서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내 손끝에 이상한 무게를 남긴다. 왜냐하면 나는 위로를 주려고 쓴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남으려고 쓴다. 내가 너무 오래 죽어 있었던 시간들에서 빠져나오려고 쓴다. 내 글이 누군가의 어둠 속에서 불씨가 된다면 그것은 기적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기적은 내 의도가 아니었다. 내 의도는 내가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글은 나를 데려오는 작업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는 작업이다. 그 작업이 끝없이 이어진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무너지는 나를 붙잡으려는 마지막 몸짓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얼어붙을까 두려워 작은 불씨를 살피듯이 문장을 쓴다. 타올라버릴까 무서워 물을 부어가며 문장을 다룬다. 문장을 쓰는 동안 나는 숨을 쉰다. 문장을 쓰는 동안 나는 살아 있다는 확신을 얇게나마 붙잡는다.
어쩌면 나는 문장으로 뜨거운 나를 식히고 또 차가운 나를 데피며 산다는 말조차 아직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문장으로 나의 생을 얇게 연장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글은 내가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조금 더 늦추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늦춤이 나에게는 생명이다. 멈춰버린 심장을 문장이라는 심폐소생으로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나는 살아 있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보려고 글을 쓴다. 정말로 나를 건져 올리려고 어둠 속에서 문장을 길어 올린다.
오늘, 나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문장을 건져 올린다. 이것이 나를 살리고 이것이 나를 묻고 이것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나는 글 속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천천히 다시 태어난다. 그 사이에서 나는 아주 조용히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