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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등같은 인연

우리는 우리에게 누구였나

by 마르치아


사람의 생에는 너무 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너무 많은 목소리가 멀어지고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가지만 그 모든 흐름 속에서도 이상하게 지워지지 않는 얼굴이 있다. 오래 함께한 사람보다도 짧게 스쳐간 사람이 오히려 마음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오래 불을 밝히기도 한다. 꼭 죽음의 문턱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여러 번 작은 죽음과 작은 탄생을 겪는 순간마다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사람 그런 인연이 있다.


누군가에게 나는 아마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름을 남긴 사람도 아니고 특별한 약속을 한 사람도 아니고 운명처럼 얽힌 사람도 아니지만 어느 장면에서는 문득 떠오를 사람이 되고 어느 계절에서는 바람을 타고 스치는 사람 그런 조용한 흔적으로 남았을 것이다. 모든 인연이 사랑의 불꽃처럼 타오를 필요는 없다. 어떤 인연은 불꽃이 아니라 희미한 촛불처럼 오래 오래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남는다. 나는 그런 촛불 같은 인연이었기를 바란다.


사람이 누군가를 주마등처럼 떠올리는 순간은 대개 삶의 어떤 문턱을 넘을 때다. 절망이 깊어 끝이 보이지 않을 때도 그렇고 스스로가 한없이 찌그러져 보일 때도 그렇고 혹은 기적처럼 작은 행복이 찾아와 미소를 지을 때도 그렇다. 그런 순간에 떠오르는 사람은 감정의 날것으로 타올랐던 사람이 아니라 존재를 존중받았던 사람이다. 내 존재의 허물까지 받아준 사람 내 고독을 무시하지 않고 그저 옆에 앉아 주던 사람 내 삶의 어둠을 비난하지 않던 사람 그런 존재가 주마등이 된다.


나는 누구에게 그런 사람이었을까 혼자 질문하면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내가 떠났을 때 그 사람이 나를 떠올렸을까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어도 문득 내 얼굴이 스쳐 지나갔을까 우리가 함께 웃었던 작은 한 장면이 그 사람의 생에 남았을까 우리는 서로를 붙잡지 않았지만 서로의 생을 아주 조금은 바꿔놓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하면 가슴 한쪽이 조용히 따뜻해진다.


주마등 같은 인연은 크지 않다. 드라마처럼 사건이 많지도 않고 영원히 이어지지도 않는다. 삶의 한 페이지를 열면 은근하게 빛이 머무는 사람 그 사람의 말 한마디가 깊은 우물 속에 떨어져 오래 잔향을 남기는 인연 그 사람의 손길 하나가 나를 살렸던 순간 그런 장면들이 있는 인연이다. 그런 사람은 우리의 삶을 뒤흔들지 않는다. 그러나 조용히 방향을 조금 틀어준다. 아주 작은 각도지만 그 각도가 수년 후 우리의 삶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이기를 바란다. 격렬하게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잠시 멈추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기를 바란다. 나를 떠올리면 호흡이 고르게 되고 가슴의 떨림이 조금 가라앉고 혼란의 물결이 잦아드는 사람 그런 존재로 남고 싶다. 사랑의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존중으로 남고 싶다. 그 사람의 삶을 통과하며 상처가 아니라 위로의 흔적을 남긴 사람이라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사람의 삶은 매일 사소한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늦게야 알았다. 어제의 내가 죽고 오늘의 내가 태어나고 희망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며 의미가 사라졌다가 또 다시 생겨난다. 이런 작은 죽음과 탄생을 지나며 우리는 수없이 주마등을 만나는데 그 주마등에는 늘 어떤 사람이 떠오른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 내가 이해했던 사람 내가 미처 붙잡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나를 붙잡지 않고 보내준 사람 그 모든 인연이 삶의 경계에서 반사된 빛으로 남는다.


나는 이제 깨닫는다. 어떤 인연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숨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몸은 멀어져도 기억이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이 끊겨도 마음이 끊긴 것은 아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서로를 향한 이해만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이해가 사랑보다 오래가고 그 존중이 그 어떤 감정보다 깊다. 그래서 떠난 인연이 오히려 주마등 같다. 빠짐없이 돌아보지 않아도 어떤 장면은 그림처럼 남는다. 서로의 생이 다르게 흘러도 그 한 장면만은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의 삶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면서도 붙잡지 않는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애정은 있지만 내 품으로 돌아오라는 욕망은 없다. 그 사람의 생이 조금 더 단단해지고 고독이 조금 덜하고 불빛이 조금 더 켜지기를 바랄 뿐이다. 이 애정은 소유가 아니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한 인간에게 보내는 조용한 기도 같은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 나는 내가 그 사람에게 주마등 같은 인연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상처로 남지 않고 후회로 남지 않고 조용한 빛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의 마음속에서도 여전히 그런 빛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도.


주마등으로 남는 인연은 결국 이런 사람이다. 내가 떠올리면 숨이 잠시 멈추는 사람 그리고 다시 숨이 편안해지는 사람. 그 사람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 질문을 오래 품었고 그 질문이 내 삶을 조금 더 깊게 만들었다. 그 사람은 나를 심연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나에게 계단을 놓아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떠올릴 때 아프지 않고 고맙다. 슬프지 않고 따뜻하다. 지나간 인연이지만 사라지지 않은 인연이다.


나는 이런 인연을 오래 안고 살아갈 것이다. 내 마지막 순간에도 눈앞을 스칠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이런 사람일 것이다. 내 생의 한 페이지를 완성해준 사람 내 어둠을 다독여준 사람 내 존재를 존중해준 사람 그런 인연이 내 주마등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인연으로 남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생을 조금은 잘 살아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남긴 인연의 무늬로 기억된다.


그 무늬가 누군가의 생을 조금이라도 비춘 적이 있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누군가에게 주마등으로 남는 사람


어둠 속에서 잠시 켜지는 작은 빛


사라졌는데도 남아 있는 사람.


그리고 언젠가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에


내 얼굴이 스쳤다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의 생에


조용히, 그러나 깊게


머물렀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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