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의 아키텍처

by 김경훈

우리는 바야흐로 현금이 사라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플라스틱 신용카드를 긁거나 스마트폰의 바코드 페이를 인식기에 접촉해 순식간에 거래를 마친다.

하지만 여전히 시장 한구석이나 작은 가게에서는 종이돈이 오간다.


돈은 신뢰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신뢰는 철저히 눈이 보이는 사람들의 시각을 기득권으로 삼아 설계되어 있다.

화려한 홀로그램과 숨은 그림은 위조를 막기 위한 기술의 결정체지만, 그 종이의 질감을 손끝으로 더듬어 액수를 알아내야 하는 시각장애인에게 한국의 지폐는 그저 크기가 똑같은 미끄러운 종잇조각일 뿐이다.


이것은 시각장애인을 위한다며 눈으로만 보이는 가짜 점을 찍어낸 행정의 기만을 꼬집고, 스스로 자신의 돈에 점자를 새겨 넣은 어느 노신사를 만나 진짜 감각의 권리를 논하게 된, 대구 서문시장에서의 왁자지껄한 오후의 기록이다.



1. 서문시장의 조끼 맨


대구 서문시장의 칼국수 골목.

김경훈은 보보의 안내를 받으며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앞에는 시각장애인 협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예순다섯 살의 최기석 어르신이 앉아 있었다.


어르신은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에도 겉과 속에 호주머니가 네 개나 달린 두툼한 조끼를 입고 있었다.

여름에도 바지 앞뒤로 주머니가 넉넉한 옷만 고집하는 분이었다.


박사 양반, 오랜만이네. 최 어르신이 김경훈의 목소리를 듣고 반갑게 맞았다.

칼국수 세 그릇 먹고 계산은 내가 할 테니 그리 알아.


어르신은 식사를 마치고 계산할 때가 되자, 특유의 의식처럼 조끼 주머니를 뒤적였다.

좌측 앞 주머니에서는 천 원짜리 세 장을, 우측 앞 주머니에서는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지폐의 액면가에 따라 넣어두는 주머니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보보가 신기한 듯 물었다.

어르신, 주머니마다 돈이 다르게 들어있나요.


그렇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눈으로 구분을 못 하니까. 처음 돈이 생기면 눈명안 사람들한테 이 돈이 얼마짜리냐고 일일이 물어봐서 분류를 해놔야 돼. 예전에는 술 먹고 헷갈려서 만 원짜리 낼 걸 오만 원짜리로 잘못 냈는데, 식당 주인이 알면서도 그냥 꿀꺽 받아간 적도 있어. 그때 느낀 배신감은 말도 못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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