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민의 이중생활
왁스 같은 질감에 노란 버터 색깔이 감도는 재스민 고체 향수를 피부에 문지른다.
체온에 녹아든 왁스가 사라지는 순간 놀라운 고양감이 찾아온다.
향기는 파도처럼 주변을 감싸고 흐른다.
고조되는 열기와 비단 같은 질감은 마치 깊은 황금빛 나무 그늘 아래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탑 노트가 지나가고 울림 있는 미들 노트가 올라오면 풍부함과 우아함 그리고 느긋함이 어우러진다. 이제 이 향기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나의 새로운 피부가 된다.
재스민은 대개 꽃 자체보다 향기로 기억된다.
한 조향사는 재스민이 없으면 향수도 없다고 단언했다.
숭고함과 일상을 하나로 묶어내는 재스민 향기에는 세상의 모든 향이 담겨 있다.
재스민 꽃은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향수다.
복잡하면서도 균형 잡힌 향은 다른 향료와 조합될 때 강력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향수의 중심인 하트 노트 역할을 수행한다.
고결한 우아함 밑에 숨겨진 지독한 냄새
재스민 향기는 독특한 반전을 품고 있다.
아주 정밀하게 향을 맡아보면 따뜻한 꿀 같은 달콤함 속에 배설물이나 부패물의 냄새가 묘하게 섞여 있다.
이는 고도로 농축된 인돌(indole)과 크레솔(cresol) 분자 때문이다.
인돌은 실제로 배설물에도 들어 있는 성분이며, 크레솔은 콜타르의 역한 냄새를 풍긴다.
아름다운 향기의 핵심에 가장 추한 냄새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꽤 철학적이다.
재스민 품종은 크게 로열 재스민이라 불리는 그란디플로룸과 샌닥으로 나뉜다.
인도 사람들은 재스민을 숲의 달빛이라 부른다.
비밀을 지키려는 듯 밤에만 꽃을 피워 어둠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프랑스 그라스 지방이 재스민 향수 산업의 성지로 유명하지만, 원산지는 인도이며 이란과 중국, 이집트 등 세계 곳곳에서 자라난다.
이른 새벽, 이슬이 맺힌 하얀 재스민 꽃봉오리들이 나무틀에 고정된 유리판 위에 촘촘하게 깔려 있다.
꽃 아래에는 투명한 돼지기름이 반질거리며 꽃의 영혼을 천천히 빨아들이고 있고, 창밖으로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오는 조용한 조향사의 작업실 풍경이다.
꽃의 영혼을 찍어내는 인내의 기술
재스민 향기는 인위적으로 흉내 내기 매우 어렵다.
그래서 천연 재스민을 직접 추출한다.
기원전 3500년부터 사용된 증류법은 가마솥에 꽃을 넣고 끓여 수증기를 냉각시키는 방식이다.
하지만 재스민처럼 예민한 꽃은 고열에 향기 분자가 파괴되기 쉽다.
그래서 근대 이전 조향사들은 냉침법을 선호했다.
냉침법은 돼지기름이나 소기름 같은 무취의 지방을 유리판에 바르고 그 위에 꽃송이를 뿌려 압착하는 방식이다.
지방이 향유로 완전히 포화될 때까지 꽃을 계속 갈아주며 기다려야 한다.
이는 마치 저속도 촬영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꽃의 은근한 향기를 한 장 한 장 찍어내는 침묵의 작업이다.
현대에는 헥세인 같은 용제를 사용하는 추출법이 주로 쓰인다.
이렇게 얻은 고체 상태를 알코올에 용해시키면 조향사들이 앱솔루트라 부르는 귀한 액체가 탄생한다.
재스민 앱솔루트 2파운드를 얻으려면 무려 3000파운드의 꽃송이가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길, 시야쥬와 마지막 갑옷
유리병 안의 재스민은 사치품이지만 들판의 재스민은 담백한 즐거움이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문가에 재스민을 심고, 엄마들은 아이의 단잠을 위해 머리맡에 재스민 접시를 놓는다.
재스민은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친근한 마음의 표현이다.
향수는 뿌리는 사람의 피부 상태와 인종 그리고 신체 부위에 따라 다르게 발향된다.
오른손잡이는 오른쪽 손목에서 더 강하게 발향되는데 이는 신체의 맥박과 움직임이 향기와 혼합되기 때문이다.
향수의 구조는 음악과 닮아 있다.
먼저 사라지는 탑 노트, 중심을 잡는 미들 노트, 마지막 피날레인 베이스 노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주된다.
프랑스어 시야쥬(sillage)는 향기가 남긴 길을 뜻한다.
내가 나 자신의 향기를 직접 맡을 수는 없지만, 손사래를 치거나 안경을 치켜올릴 때 코 끝을 스치는 재스민 향은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향수는 한 사람의 스타일을 다감각적으로 완성해주는 보이지 않는 갑옷이다.
옷이라는 갑옷을 벗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때에도 향수는 벌거벗은 몸을 여전히 덮어준다.
나에게 꼭 맞는 향기를 찾는 과정은 최고의 친구를 찾는 과정과 비슷하다.
어디엔가 있을 나의 향기를 찾는 과정을 이제 천천히 음미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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