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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속을 견뎌낸 빛깔

by 김경훈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영국의 어느 작은 도시, 고요한 도자기 전시장 한편에 리트리버 탱고가 앉아 있었습니다.

탱고는 전시장을 가득 채운 매끄러운 흙의 질감과, 그 사이로 들려오는 조지 왕의 무겁고도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었죠.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으로 왕관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 조지 5세는 날마다 불안과 책임감이라는 시련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에는 두 개의 꽃병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모양과 무늬, 원료까지 똑같았지만 하나는 눈이 부실 정도로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넘쳤고, 다른 하나는 잿빛처럼 투박하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조지 왕이 그 이유를 묻자, 탱고가 천천히 일어나 왕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탱고는 생동감 넘치는 꽃병의 표면을 코끝으로 살짝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폐하, 이 두 꽃병의 차이는 오직 하나, '불'을 통과했느냐의 여부뿐이랍니다. 윤기가 흐르는 저 꽃병은 수천 도의 뜨거운 가마 속에서 살이 타들어 가는 시련을 견뎌냈기에 비로소 저토록 아름다운 빛깔을 얻게 된 것이죠."


왕이 가만히 꽃병을 어루만지자, 탱고는 그의 불안한 눈동자를 응시하며 덧붙였습니다.


"고난과 시련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빚어내기 위한 신의 손길이에요. 불길을 거치지 않은 흙은 그저 부서지기 쉬운 덩어리에 불과하죠. 폐하에게 찾아온 지금의 어려움은 폐하의 인생을 더 윤기 있고 생동감 있게,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왕의 위엄으로 완성할 것입니다."


활활 타오르는 가마의 붉은 빛 앞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기다리는 리트리버의 의연한 실루엣.


탱고는 전시장을 나서는 왕의 뒷모습을 보며 마지막 지혜를 건넸습니다.


"그러니 다가올 불길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이 마주한 시련은 당신을 태워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의 진정한 빛을 끌어내기 위한 연금술이니까요. 가마 밖으로 나오는 순간, 당신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눈부신 존재가 되어 있을 거예요."


조지 왕의 어깨는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탱고는 다시 전시장 바닥에 누워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운 도자기는 흙의 눈물과 불의 고통이 만나 빚어낸 결정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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