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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의 감옥과 영혼의 주사위

by 김경훈


1. 성격 판별의 날


왕국력 702년, ‘분류의 달’.

수도 마이어스(Myers)의 중앙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스무 살이 된 청년들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성격 판별 의식’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광장 중앙에는 고대부터 내려온 거대한 검은 비석, ‘브릭스(Briggs)의 돌’이 우뚝 솟아 있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낮게 웅웅거리는 진동음을 내뿜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청년들의 심장 박동과 공명하여 속을 울렁거리고 메스껍게 만들었다.


대사제 테스트가 단상에 올라 엄숙하게 선언했다.


“신성한 4가지 지표에 따라 너희의 영혼을 가르노라! E(외향)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고, I(내향)는 그림자 속에서 사색하라! T(이성)는 차가운 칼날이 되고, F(감정)는 따뜻한 솜이 돼라!”


줄을 선 청년들 중 하나인 루시안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는 족보도 없는 뒷골목 출신의 사기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귀족이 되고 싶었다.


이 나라에서 신분은 핏줄이 아닌 ‘성격’으로 결정되었다.

철저한 계획형인 J는 관리나 귀족이 되었고, 즉흥적인 P는 광대나 일용직 노동자가 되었다. 냉철한 T는 법관이나 기사가 되었고, 감성적인 F는 예술가나 하인이 되었다.


최고의 계급은 ESTJ(엄격한 관리자).

최하의 계급은 INFP(열정적인 중재자… 라 쓰고 ‘망상에 빠진 백수’라 읽는다)였다.


루시안의 앞 순서인 여자가 비석에 손을 댔다.

우웅- 비석이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더니, 허공에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INFP - 잔다르크 형]


대사제가 혀를 찼다.


“쯧쯧. 감성적이고 계획도 없고 내향적이군. 너는 평생 골방에서 시나 쓰다가 굶어 죽을 운명이다. ‘감성 수용소’로 보내라!”


“아, 안 돼요! 제발! 저는 계획적으로 살 수 있어요!”


여자가 울며불며 끌려갔다. 기사들은 그녀의 눈물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거칠게 팔을 잡아끌었다.


드디어 루시안의 차례.

그는 품속에 숨겨둔 마법 아티팩트, ‘위선의 반지’를 꽉 쥐었다. 암시장에서 전 재산을 털어 산 물건이었다. 이 반지만 있다면 자신의 본성인 게으르고 즉흥적인(P) 성향을 숨기고, 완벽한 지도자(J)로 위장할 수 있었다.


루시안이 비석에 손을 얹었다. 돌의 표면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손바닥을 찌르는 듯한 따끔거림이 전해져 왔다.


지이잉…


비석이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글자가 떠올랐다.


[ENTJ - 대담한 통솔자]


광장이 술렁거렸다.


“오오! 지도자의 자질이다!”

“귀족 계급이야!”


대사제의 표정이 환해졌다.


“훌륭하군. 너는 태생부터 남들을 부릴 운명이다. ‘황금의 성채’로 입성하라!”


루시안은 씩 웃었다. 성공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가난은 끝이다.



2. 황금 성채의 강박증


하지만 루시안의 환상은 입성한 지 하루 만에 산산조각 났다.


귀족들이 산다는 ‘황금의 성채’는 천국이 아니라 정신병동이었다.

이곳은 철저한 J(판단/계획)와 T(이성/사고)들의 세상이었다.


아침 6시 정각.

댕, 댕, 댕.


거대한 시계탑이 울리자마자, 모든 귀족이 동시에 눈을 떴다. 1초의 오차도 없었다.


“기상. 세수 3분. 양치 2분. 식사 15분. 배변 5분.”


기숙사 사감은 스톱워치를 들고 복도를 돌아다녔다.


식당에서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식탁 위에는 영양소가 완벽하게 계산된(하지만 맛은 톱밥 같은) ‘블록 푸드’가 놓여 있었다.


“자네, 어제 섭취한 칼로리가 권장량보다 0.5% 초과했더군. 오늘은 밥알 3개를 덜 먹게.”


옆자리의 귀족이 루시안에게 충고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루시안은 억지로 웃으며 밥을 삼켰다. 목구멍이 까끌까끌했다.


이곳의 대화는 더 끔찍했다. T(사고) 성향이 지배하는 곳이라, 공감이나 위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 귀족 부인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쿠당탕!


“아야! 피… 피가 나요!”


부인이 울먹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괜찮으세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귀족들은 달랐다.


“음. 넘어진 각도와 중력 가속도를 계산해 볼 때, 전방 3미터 지점의 대리석 타일 마찰계수가 낮았던 것이 원인이군.” (분석)

“일어나시오. 울 시간에 지혈을 하는 것이 생존 확률을 0.1%라도 높이는 길입니다.” (팩트 폭력)

“부인, 왜 앞을 안 보고 다닙니까? 부주의함은 지능 문제로 귀결됩니다.” (비난)


아무도 부인을 일으켜주지 않았다. 부인은 혼자 피를 닦으며 일어나야 했다.


루시안(본성은 극단적 P이자 F)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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