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게'는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 도구다. 하지만 도려내는 것만으로는 환자를 살릴 수 없다.
텅 빈 환부에 새 살이 돋게 하려면, 혹은 쏟아지는 피를 멈추게 하려면, 때로는 흐름을 바꾸고 잇는 '봉합(Suture)'과 '우회(Bypass)'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운용(Application)'.
단순히 파동을 끊는 것이 아니라, 파동의 결을 타고 넘어가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기술이다.
- 영적 균형 학회 4대 석학, 김경훈.
「조율과 축출에 관한 소고 - 개정판 서문」 (자가 출판, 2025년) 36쪽 (심화 과정 편).
에피소드 35. 우주의 파동과 침묵의 마에스트로
1.
[황 보 부동산 컨설팅] 사무실에는 기묘한 평화가 감돌고 있었다.
물론 그 평화는 콜라가 말라붙어 끈적이는 바닥과, 튀김 기름 냄새가 밴 소파 위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세상에, 감정가 50억?"
황 소장이 바카라 크리스탈 잔을 든 손을 떨었다. (물론 잔에 든 것은 콜라가 아니라, 조 실장이 급하게 공수해 온 최고급 생수였다.)
그녀의 책상 위, 델보 가방 옆에는 톡톡이(콜라 외계인)가 뱉어놓고 간 다이아몬드 원석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 실장이 GBI의 장비로 1차 감정을 마친 결과였다.
"네. 탄소 밀도가 지구상의 어떤 다이아몬드보다 높아요. 이건 보석이라기보다... 거의 에너지 결정체예요."
조 실장이 에일리언웨어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대박이다, 진짜. 50억... 핫바 군 꼬챙이도 소재 공학 연구소에 팔면 최소 10억은 받을 거고."
황 소장은 샤넬 트위드 재킷의 먼지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계산기를 두드리며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튀김 기름이나 탄산 자국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숫자의 아름다운 배열만이 보일 뿐이었다.
한편, 소파에 앉은 김경훈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로로 피아나 가운을 벗어던지고, 예비용으로 두었던 브루넬로 쿠치넬리 캐시미어 니트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옷을 갈아입어도, 코끝에 맴도는 느끼한 기름 냄새와 톡 쏘는 탄산의 잔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황 보. 환기는 언제쯤 완료됩니까? 제 마크 레빈슨 앰프 회로 사이에 설탕 결정이 낄까 봐 두렵군요."
김경훈이 JH 오디오 커스텀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투덜거렸다.
그는 사무실에 남은 외계인들의 파동을 분석하려 했지만, 끈적하고 미끌거리는 노이즈 때문에 제대로 된 청진이 불가능했다. 마치 귓속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먹먹하고 불쾌했다.
[냠냠... 쩝쩝...]
책상 밑에서는 탱고가 핫바 군이 남기고 간 튀김 부스러기를 행복하게 핥아먹고 있었다. 에르메스 하네스에는 콜라 얼룩이 묻어 있었지만, 탱고는 개의치 않았다.
[팀장님, 우주 맛이에요! 별똥별 맛이 나요!]
"그래. 별똥별에도 콜레스테롤은 있겠지."
김경훈이 한숨을 내쉬며 아스텔 앤 컨 플레이어의 볼륨을 높였다. '스승'의 정적 파동을 재생해 이 난장판 된 사무실의 공기를 정화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2.
... 뚝.
사무실을 가득 채우던 황 소장의 '환희(C#)'와 탱고의 '식탐(A)', 그리고 조 실장의 '흥분(G#)'이 일시에 끊어졌다.
물리적인 소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공기 자체가 무거워지며, 모든 파동을 집어삼키는 압도적인 '밀도'가 사무실을 덮쳤다.
김경훈의 아스텔 앤 컨 플레이어가 멈췄다. 배터리가 나간 것이 아니었다. 출력되는 전자 신호 자체가 이 거대한 '정적' 앞에서 길을 잃고 소멸해 버린 것이다.
"......!"
김경훈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느낌. 17살 충주 기숙사의 그 눅눅한 절망을 단숨에 잠재웠던, 그리고 저승 관리국 서버 룸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그 파동.
"오셨군요."
사무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려 있었다.
문밖의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 어둠 속에서 한 노인이 걸어 들어왔다.
낡은 갈색 스웨터.
브랜드 로고 하나 없지만, 김경훈의 로로 피아나보다 더 깊고 부드러운 텍스처가 느껴지는 옷.
흰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노인의 눈은 다이아몬드를 보고 환호하던 황 소장과 튀김 부스러기를 핥던 탱고를 지나, 김경훈의 선글라스 안쪽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스승이었다.
"다... 당신!"
황 소장이 다이아몬드를 황급히 델보 가방에 숨기며 뒷걸음질 쳤다. 지난번 '저승 소환' 사건 때 스승의 위력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본주의적 결계'도 이 노인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깨갱...]
탱고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꼬리를 말았다. 맹수의 본능이 '상위 포식자'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
"4대 석학."
스승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사무실의 모든 사물에 공명을 일으켰다. 깨진 유리조각들이 미세하게 떨렸고, 공기 중의 먼지가 멈췄다.
"돈 맛을 보니 좋으냐."
3.
김경훈은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저... 'A/S 비용'을 정산했을 뿐입니다."
"A/S라..."
스승이 천천히 걸어와, 콜라 얼룩이 묻은 마크 레빈슨 앰프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네놈이 '집게'로 집어낸 그 '외계'의 파동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느냐?"
"단순한... '고칼로리 데이터' 오류 아니었습니까?"
"어리석은 놈."
스승이 혀를 찼다.
"네가 GBI의 장비를 부수고, 차승목의 아지트에서 파동을 터트리고, 저승 서버 룸에서 '부가세'를 외칠 때마다... 네놈의 그 '버그(태평요술)'는 우주를 향해 '좌표'를 찍어내고 있었다."
스승이 허공에 손을 그었다. 그러자 공기 중에 희미한 파문의 형상이 그려졌다.
"네가 핫바와 콜라라고 부르는 그것들. 그것들은 단순한 부스러기다. 네가 만든 파동의 '잔물결'에 휩쓸려 온 피라미들에 불과해. 하지만..."
스승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피라미가 꼬인다는 건, 곧 상어가 온다는 뜻이다."
"상어... 라면?"
김경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우주의 파동까지 건드렸어.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스승이 김경훈의 손을 잡았다. 거칠지만 따뜻한,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악력.
"네가 가진 '집게'로는 피라미나 솎아낼 뿐, 다가오는 해일은 막을 수 없다. 제천대성이 왜 네놈을 '장난감'이라 불렀는지 아느냐? 네가 가진 건 '핵폭탄(태평요술)' 발사 버튼인데, 넌 그걸로 '파리'나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4.
"가르쳐주십시오."
김경훈이 무릎을 꿇을 듯한 기세로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아직 '소음'이 두렵습니다."
그는 솔직했다. 각성을 통해 '집게'를 얻었지만, 여전히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17살의 F 마이너 트라우마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더 큰 힘을 개방했다가 다시 그 '소음의 홍수'에 휩쓸려 자아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두려움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에 잡아먹히면 넌 영원히 '조율사' 흉내만 내는 '환자'로 남을 게야."
스승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낡은 메트로놈이었다. 태엽을 감아 쓰는 아주 오래된 목재 메트로놈.
"이걸 봐라."
스승이 메트로놈의 태엽을 감고 바늘을 놓았다.
똑, 딱, 똑, 딱.
일정한 박자가 사무실에 울렸다.
"이 소리가 들리느냐?"
"네. A-440Hz 기준음에서 정확히 60 BPM으로..."
"아니."
스승이 말을 잘랐다.
"소리를 듣지 말고, '사이'를 들어라."
"사이요?"
"똑, 과 딱, 사이의 침묵. 소리와 소리 사이의 여백. 파동과 파동이 부딪히지 않고 흘러가는 그 '길'을 보란 말이다."
김경훈은 멍하니 메트로놈을 바라보았다.
소리를 분석하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던 그에게 '여백'을 들으라는 말은 선문답처럼 들렸다.
"네놈의 '집게'는 불협화음을 끄집어내는 기술이다. 하지만 상위의 존재들은 파동 자체가 거대해. 끄집어내려다가는 네 팔이 먼저 부러진다."
스승이 손가락으로 메트로놈의 바늘을 툭 건드렸다. 바늘의 리듬이 깨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원래의 박자를 찾아갔다. 흔들리지만 멈추지 않고, 흐름을 타고 다시 균형을 잡는 모습.
"받아넘겨라."
스승이 말했다.
"파동을 막지 말고, 끊지 말고... 네 몸을 통해 '흘려보내는(Flow)'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태평요술의 다음 단계, '운용(Application)'이다."
5.
"운용..."
김경훈은 눈을 감았다. 선글라스 안쪽의 어둠 속에서 그는 메트로놈의 소리를 다시 들었다.
똑... (공백)... 딱.
그동안 그는 저 '공백'을 두려워했다. 침묵은 곧 'F 마이너'의 습격이라고 생각했기에, 항상 JH 오디오나 마크 레빈슨으로 소리를 채워 넣으려 했다.
하지만 스승은 그 공백 속에 '길'이 있다고 했다.
"해보겠습니다."
김경훈이 아스텔 앤 컨 플레이어를 내려놓았다. JH 오디오 이어폰도 뺐다.
그는 맨 귀로, 사무실의 공기를 느꼈다.
아직 남아있는 핫바 군의 기름 냄새 파동. 톡톡이의 탄산 파동. 그리고 황 소장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만드는 미세한 진동.
이전 같으면 이 잡다한 파동들을 '분석'하고 '차단'하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두었다.
파동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이 자신의 몸을 통과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막지 않는다. 쥐지 않는다. 그저... 길이 된다.'
... 슈우우욱...
김경훈의 몸 주변으로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마치 그가 투명해진 것처럼, 주변의 소음들이 그를 건드리지 않고 부드럽게 휘어 돌아갔다.
그의 브루넬로 쿠치넬리 니트가 바람도 없는데 살짝 일렁였다.
"오..."
조 실장이 속삭였다.
"팀장님 주변의 데이터 값이... '0(Zero)'으로 수렴하고 있어요. 마치... 블랙홀처럼, 하지만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모든 걸 투과시키는 '웜홀' 같아요."
스승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제법 흉내는 내는구나. 4대 석학."
스승이 메트로놈을 멈췄다.
"기억해라. '집게'는 점(Point)을 다루지만, '운용'은 선(Line)을 다룬다.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를 집게로 집을 순 없어. 그 위에 올라타야지."
6.
스승은 메트로놈을 김경훈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50억짜리 다이아몬드 옆에 놓인 낡은 메트로놈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가보마. 시간이 없다."
스승이 돌아섰다.
"스승님! 어디로 가십니까!"
김경훈이 외쳤다.
"막아야 할 것이 있다. 네가 낸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진짜 '불청객'들을."
스승은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정적처럼.
사무실엔 다시 김경훈과 헬프 데스크 팀만 남았다.
"김 팀장... 저 영감님, 진짜 무서워."
황 소장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스승이 있는 동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3천억 도, 다이아몬드도, 저 압도적인 '격(格)' 앞에서는 종이조각처럼 느껴졌다.
김경훈은 책상 위의 메트로놈을 만지작거렸다.
나무의 거친 질감. 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깊고 단단한 울림.
"운용(Application)..."
그는 이제 알았다.
자신의 '조율'이 1단계 '치료(Cure)'였다면, 이제 2단계 '관리(Management)'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환자를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병원의 시스템을 돌리는 '병원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조 실장의 노트북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팀장님. GBI 위성망에서 새로운 신호가 잡혔어요.]
[이번엔... 우주가 아니에요. '지상'입니다.]
"지상?"
[네. 한국... 아니, 서울 한복판. 거대한 '종교 단체'의 서버에서 비정상적인 트래픽이 발생하고 있어요. 키워드는... '구원'과 '파멸'. 그리고... '4대 석학'이 언급되고 있어요.]
김경훈이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스승의 말이 맞았다. 피라미 다음은 상어다.
그리고 그 상어는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 밑바닥에서부터 입을 벌리고 있었다.
"황 보. 다이아몬드 현금화 서두르시죠."
김경훈이 낡은 메트로놈을 챙기며 말했다.
"다음 '환자'는... '사이비'인 것 같습니다."
(에피소드 35.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