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잠시 쉼표를 찍고 재정비를 하기로 했다. 왜 떠나는지, 그리고 이 시간 동안 무엇을 하려는지 정리해 두려 한다.
유퀴즈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인생의 행로를 바꿀 때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했다. 외부에 매력적인 것이 나를 끌어당기는 인력, 그리고 내부의 문제들이 나를 밀쳐내는 척력. 몇 년 전부터 내가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서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의 경우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해, 드디어 행로를 바꾸는 실험을 해보자고 결정 내렸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없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이 시간을 갖고 나야만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명확히 알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동진 평론가는 ‘망가져도 좋아’라는 생각으로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평론가로서 삶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의 나 역시 그랬다.
망가져도 좋아.
그래도 이 시간은 꼭 가져봐야겠다.
왜 떠나는지
지난 2년 반동안 이커머스 마케터로 일했다. 브랜드에서 처음 이커머스에 왔을 때 무슨 느낌이었나 돌이켜보면, 나라는 사람은 수영 선수인데 등산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써본 적 없던 근육을 쓰는 것처럼, 기존 문법과는 다른 일들을 하는 것이 낯설었다. 참고로 브랜드사와 다른, 이커머스 마케터 일에 대해서는 아래 글에 써두었다.
https://brunch.co.kr/@236project/137
당시에도 이미 나라는 사람이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브랜드로 돌아가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버티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이커머스에서만, 그리고 이 회사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이 경험들이 언젠가 브랜드사로 돌아갔을 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난 2년 반을 돌이켜보면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던 것도 맞다.
그런데 그냥 한 번 경험해 보면 좋겠다 정도의 생각으로는 버티기 힘든 회사기는 했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곳이다 보니,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그리고 아무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일하도록 나를 계속 채찍질해야 했다. 이 일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어도 버티기 힘든데, 내가 원하는 일도 아니다 보니 시간을 보낼수록 원하는 나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맡고 있는 일이 3번 이상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긴장감, 압박감이 너무 높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이렇게 부족한데 수영은 잘한 적은 있나 라는 의구심, 이제는 운동 자체가 싫어지는 순간까지 와버렸다. 내 본모습, 적어도 마케팅이 즐거웠던 나의 아이덴티티마저 잃어버리기 전에 결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내가 가고자 하는 커리어 골을 생각해 보면 1)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브랜드에서 마케팅을 하거나 혹은 2)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는데, 지금 내가 고생하며 배우는 것들은 내 미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배울 것은 많고 성장할 것도 많겠지만, 지금은 버텨야 할 때가 아니라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결정했다. 더 이상 잘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번아웃이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어떤 상황에서도 일을 해내는 것에 집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 될 이유만 보인다던지, 일이 갑자기 낯설어 보인다던지, 무기력해지는 것 같았다. 사실 이런 상황을 만나기 전에, 더 빨리 떠났어야 했는데 좀 미련하게 버티기도 했다.
떠나는 또 다른 이유
하지만 이 결정의 결과가 이직이 아닌 재정비 시간인 이유는, 글쓰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게 떠나는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바쁜 와중에도 내가 시간이 날 때마다 무얼 하고 있나 보면 글을 쓰거나 읽고 있었다. 집에 와서 아이를 재우고 나면 밤 12시는 훌쩍 넘어있지만, 그럼에도 잠을 줄여서 매일 1시간씩 글을 쓰고 있었다. 쓰고 싶어서, 쓰지 않으면 안 돼서, 이 이야기는 남겨야 해서 등 써야 할 이유가 너무나 많았다. 쓰면 쓸수록 쓰고 싶은 이야기는 늘어났고 하루 1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한 번쯤은 모든 것을 멈추고서 글을 써야 할 것 같았고, 매일 푸념처럼 글 한 번 진득하게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의 소리였다.
바쁜 와중에도 몇 가지를 깨닫고 얻었는데, 매일 하루 1시간씩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나답게 일하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 안에 넘쳐나는 생각들을 글로 하나씩 쓰고 있었는데, 내가 쓰는 글들은 모두 ‘나답게 일하기’라는 큰 주제와 연결되었다. 나답게 일하기 위해서는 1) 내게 맞는 일을 찾고, 2) 그 일을 잘해야 하고 (적어도 주눅 들지 않기 위해서), 3) 회사에서 마음 단단히 일해야 하는데, 내가 쓰는 글들은 모두 이 갈래에 속했다. 그래서 23년에는 내게 맞는 일을 찾았던 경험을 담아 <그렇게 진짜 마케터가 된다>라는 책을 냈었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에 매일 글을 쓴 덕분에 8월 중순에는 일을 잘하는 것에 대해, <주니어 성장가이드 (제목은 아직 가안이지만)>로 두 번째 책도 나올 예정이다. 이렇게 토막 시간 글을 써서 책을 쓰는데 내게 한 번 진득하게 시간을 주고 나면 기대해 볼 만한 무언가가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내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이 시간 이후에 알게 될 것
이제 내가 기존의 길에 머물 것인지, 새로운 길을 갈 것인지 갈림길에 서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슨 길이 옳은지, 그 길을 가고 나면 어떤 길이 펼쳐지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앞으로 5개월간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은 명확하다. 더는 미루지 말고 한 번쯤은 글을 진득하게 써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그냥 내 마음이 늘 하고 있는 이야기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일들을 끝내고 나면 그다음에 무엇을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마케터로 달릴 힘을 얻든, 글에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든 방향이 잡힐 것 같았다.
무엇을 할 것인지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해 보면,
1. 먼저 <마음 단단히>를 물성을 가진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답게 일하기’의 세 번째 영역, 마음 단단히 일하는 법에 대해 완성하려 한다. 늦어도 내년 초 출간 계약을 목표로, 그게 안되면 펀딩을 하더라도, 이 책은 마무리 지으려 한다. 초년생 때 회사가 너무 힘들어서, ‘다들 안 힘든가? 어떻게 저렇게 웃고 지내지? 나만 힘든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당시에 여러 이야기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했지만,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만 있었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마음 단단히 일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 당시에 찾지 못했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내가 직접 겪으며 깨달은 마음 단단히 나를 돌보며 일하는 법을 과거의 내게 전해준다는 생각으로 완성하려 한다. 그리고 마음 단단히 일하는 법에 대해 여러 문장들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또 최근에 마음이 다칠 때까지 버티면서 이 주제를 고민해봤으니, 지금이 이 주제를 가장 잘 쓸 수 있는 시기지 않을까. 이제야 이 글들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2. 그리고 소설 1편을 쓰려한다. 내게는 소설처럼 뇌리에 박힌 사건이 있는데, 내가 일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올해 그 이야기를 소설로 남겨보려 한다.
잠시 멈추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어 내 결정에 대해 풀어써보았다. 누군가 그랬다. 어떤 선택이 두렵지만 그럼에도 그 선택을 한다면 제대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실험 기간 동안 생각들을 더 잘게 쪼개어 더 자주 기록하고, 끝내야겠다고 다짐한 글들을 완성해 보려 한다. 이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