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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길: '귀엽다'라는 말이 금지된 사회

우리 공동체의 신뢰는 회복가능한가?

by root
진정 우리는 이웃의 아이에게 “귀엽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사회에서
그 불신의 공기를 일상의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도 괜찮은 것인가?

요즘 주변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이 유독 귀여워 보인다. 엘리베이터나 놀이터, 길가에서 스쳐가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눈에 비치는 세상의 경이로움에 대한 호기심은 삶의 활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런 느낌을 내가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나는 어색한 경계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귀엽네’ 혹은 ‘예쁘네’ 그 한마디가 보호자에게 경계의 대상으로 분류되고 불쾌한 행동의 전조로 오인될 수 있다. 실제로 아이의 부모는 어색하게 불편한 얼굴을 하고 돌아선다. 이렇듯 지금의 우리 사회는 말 한마디로 공동체의 신뢰를 시험받는 사회이고 분명 이것은 이상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아이를 귀엽다고 칭찬하는 것이 경계심을 일으킬만한 행위가 된 것이 어찌 한 개인의 의심 많은 특별한 성향 때문이겠는가?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이미 ‘안전하지 않음’이라는 인식의 토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두려워하면서 누구도 명확한 신뢰로움을 주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누구에게도 함부로 호의를 베풀 수는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 공동체의 일상에서조차 이렇듯 말의 가능성이 봉쇄되어 있으니 이미 우리는 윤리의 사막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끊임없이 발생하는 범죄와 기괴한 뉴스 기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경계심을 강화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모두 '예외상태'에서 거주해야만 하는 것인가? 조심스러운 경계가 일상이 되고, 서로 간에 무표정함이 방어기제로 기능하게 되면서, 주변의 인간관계가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되는 곳 이제 그곳은 더 이상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는 곳이다. 오직 계약을 바탕으로 생존만을 위해 무리 지어 있을 뿐 공동존재하는 삶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건강한 공동체는 세상 모든 위험을 제거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위험이란 것이 존재하더라도 서로 간 신뢰와 응답의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을 지향하는 관계의 구조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인과 응답하고 감응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이웃의 아이를 보고 ‘귀엽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타자의 말이나 시선을 무조건적으로 의심하지는 않는 건강함을 유지하는 사회다.


진정 우리는 주변에서 마주치는 아이에게 “귀엽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이 조심스러운 사회에서 그 불신의 공기를 일상의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도 괜찮은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오래된 과제인 ‘신뢰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CCTV의 설치 숫자나 법, 제도의 정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더 본질적인 변화로써의 해답은 우리의 존재적 태도에 있다.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호의는 건강한 관계의 가능성이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호의에 온전히 감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동체는 온전히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과 타자의 말이 살아 있으며 그에 대한 신뢰가 흐르는 관계의 장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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