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고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맴맴 Oct 30. 2024

퇴사날까지 하루 남았습니다!

20241008





임신하고 아이를 가지면 더이상 유럽은 못 갈 거 같아서 추석에 여행계획을 짰다. 물론 시댁에선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뭐, 잘 다녀왔다. 여행 후 다시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장님이 날 부르셨다.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다면서 말이다.

뭐지? 싶다가도 또 월급 동결인가 예상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서류한 장을 내밀었는데, 권고사직서였다.

회사를 이렇게 오래 다닌 것도 권고사직도 처음이어서 억울함보단 신기함에 가까운 감정이 들었다.


작년에 10년 차 대리님이 권고사직을 당했는데, 언젠가 내 차례가 오겠구나 싶긴 했다.

예상은 적중했고, 작은 회사에 별 기대를 안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임신했을 때 단축근무, 육아휴직을 쓸 수 없을 거라는 불안함이 있었는데 뭔가 묵은 체증이 없어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미안해하시는 사장님을 위로했다.

'전 괜찮아요.'

대화 끝에 내가 성격이 참 좋다는 말을 하셨지만, 난 그저 권고사직이 좀 신기했고 고민거리가 사라지니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일단, 내가 자진퇴사한 게 아니어서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 출근하는 길에 대리님을 만났다. 살아남은 대리님은 날 안타깝게 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별 생각이 없어서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남아있는 출근 날짜는 한 달이 되었다.




생리를 안 해서 좀 불안했는데 날짜가 임신하기엔 불가능한데 임신테스터기는 두줄이어서 산부인과를 방문했다. 산부인과에서 재검사를 하고 임신확정이 되었다.

이게 무슨..

황당할 정도로 기가 막힌 타이밍.

권고사직 들은 주간에 임신을 알게 된 것이다.

추석 이후에 갖도록 계획은 짰으나, 더 일찍 찾아왔다. 남편도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기쁨이때처럼 남편을 죽일 듯이 째려봤지만, 기쁨이때는 울고불고 화가 났다면. 이번엔 이상하게 아무렇지가 않았다.


기쁨이때는 지하철도 니글거리고 힘들어했는데 이상하게 괜찮았다. 극도로 예민했던 예전과 달리 참을 정도라는 게 신기했다.

참을만한 자신에게 물어볼 정도.. '너 왜 괜찮아?'


남편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두 원인이 없어져서 그런 거 아니냐며 웃었다.

나도 웃었지만, 낸들 아나.


사실 몇 달 전부터 꽤 오래 SNS를 끊었다. 생각지 못한 효과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고 불안도가 사라졌다. 이게 정말 놀라웠다. (어플에 그림계정도 있어서 계정까지는 탈퇴를 못했으나, 계속 필요성이 없으면 탈퇴를 할 거 같다) 복잡했던 생각이 단순해졌고 그래서 마음에 불안도가 낮아졌다. 효과는 좋았다. 그래서 그런 걸까? 마음이 편안했다.


그래도 육체적인 건 막을 수 없었는데 새벽에 자꾸 깨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자궁이 커지면서 방광을 눌러 소변조절이 잘 안 됨) 그 와중에 남편이 드르렁 세상모르게 자고 있으면 얄미웠다. 그래서 깨웠다.

남편은 졸린 와중에도 내 걱정을 했다. 눈 감은 채로 '아 어떻게 괜찮아?ㅠㅠ'(더 얄미움)라고 말하는 게 남편에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 남편이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산부인과를 재방문했다.

나는 기쁨이때 듣지 못했던 심장소리를 처음 들었다.

나중에 말해줘서 알았는데, 남편이 심장소리 듣더니 울컥했다고 했다. 난 그저 신기했는데 울컥한 남편보고 울컥할 정도면 나 대신 임신 해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질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산부인과에서 매주 진료를 보겠다고 했다. 좀 기분이 묘했지만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긴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기쁨이때 받았던 임산부배지를 가방에 달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상의 후 퇴사날을 앞당기기로 하고 사장님께 조율이 가능한지 물어봤다. 사장님은 취업했냐며 왜 일찍 앞당기냐고 물으셨지만 임신 소식을 알리기 싫어서 '제 살길 살아야죠.' 하고 말았다.

그렇게 디데이가 앞당겨졌는데

남편은 놀리듯 '병장님, 퇴사까지 00일 남았습니다!' 하고 퇴사날 디데이를 알려줬다.

(군대에서 곧 재대 앞둔 병장들에게 저렇게 한다면서..)


갑자기 폭풍 불듯, 한순간에 바뀌어버린 삶에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하나님께 가장 좋은 적기에 생기게 해달라고 한 기도가 이루어진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태명은 하도 니글거려서 상큼이로 했고(단순) 매일 밤 남편과 기도하게 되었다.

상큼이가 내 질환에 영향받지 않고 손, 발 다섯 개씩 눈코입 잘 달려있고 조화로운 외모로 나오길 기도했다.




이상하게 괜찮고, 이상하게 아무 생각이 없어서 나조차 당황스럽다.

지금의 나를 제대로 느끼며 만끽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후르츠바스켓-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