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매일 쓰는 인공지능(AI) 서비스의 심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반도체 칩입니다. 그런데 이 최첨단 칩을 찍어내는 핵심 장비는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의 한 기업, ASML에서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장비 한 대 가격이 무려 5,000억 원에 달하는 이 거대한 기계는, 이제 단순한 생산 설비를 넘어 AI 시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떠올랐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빛의 마법’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반도체는 실리콘 웨이퍼 위에 빛을 쏘아 미세 회로를 새겨 넣는 ‘노광(리소그래피)’ 과정으로 탄생합니다. 회로를 얼마나 더 촘촘하게 그리느냐에 따라 성능이 결정되죠. ASML이 독점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현존 인류 기술의 최고봉으로 평가받습니다.
진공 챔버 안에서 초당 5만 개의 주석 방울을 레이저로 두 번 타격해 태양 표면보다 40배 뜨거운 플라즈마를 만들고, 여기서 방출된 극자외선을 완벽한 다층 거울로 반사해 회로를 새긴다―영화 같은 장면이 실제 공정입니다.
이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을 따라 할 곳은 없습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TSMC·인텔 등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 모두 ASML 장비에 의존합니다. ASML이 재채기만 해도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
ASML의 독점은 곧 지정학적 무기입니다. 미국은 중국의 AI 굴기를 견제하며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해 EUV 장비의 대중 수출을 차단했습니다. 답답해진 중국은 두 갈래 전략으로 돌파구를 찾습니다.
멀티패터닝: 구형 장비로 동일 면적을 여러 번 노광해 미세 공정을 흉내 내는 방식. 공정 시간·비용이 늘지만 당장 가능한 대안입니다.
자체 개발: 천문학적 투자를 통해 EUV급 장비를 직접 만들겠다 선언했지만, ASML 생태계를 구성하는 5,000여 개 전문 부품·소재 기업망을 새로 꾸려야 하는 난제가 남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EUV 수준을 달성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진단합니다.
한때 노광장비 강자였던 일본 캐논은 완전히 다른 해법으로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나노임프린트 리소그래피(NIL) 기술입니다.
방식: EUV가 빛으로 회로를 ‘그린다면’, NIL은 회로 패턴이 새겨진 ‘도장’을 웨이퍼에 직접 ‘찍어낸다’는 발상.
장점: 레이저·거울 시스템이 없어 장비가 작고 가격이 싸집니다.
숙제: 작은 먼지 하나로도 불량률이 급상승하고, 수십 개 층을 나노미터 단위로 정렬(어라이먼트)하기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시간당 웨이퍼 처리량도 EUV에 못 미쳐 대량 생산에는 아직 한계가 있습니다.
캐논은 불량에 비교적 관대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테스트베드 삼아 기술 완성도를 끌어올린 뒤 로직 공정으로 확장하겠다는 전략입니다.
ASML의 독주, 중국의 추격, 일본의 역발상. 이 ‘노광장비 삼국지’는 결코 먼 나라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메모리 반도체 1위를 자부하는 대한민국도 생산 공정의 핵심 열쇠는 네덜란드 손에 있습니다.
공급망 안정성: ASML 장비 수급 차질은 곧바로 국내 반도체 생산 차질로 직결됩니다.
초격차 기술: EUV 이후 차세대 노광 기술(하이 NA EUV·멀티빔·NIL 등)까지 선제 확보해야 ‘패권 전환’의 변곡점을 선점할 수 있습니다.
AI 시대로 향하는 문은 이미 활짝 열렸습니다. 이제는 ‘빛’을 다루는 전략이 국가·기업의 운명을 가릅니다.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한국이 다시 한 번 기술 초격차를 증명할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