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듯 있는 듯

9화

없는 듯, 있는 듯


처음엔 눈만 마주쳐도 웃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표정 하나로 온갖 얘기를 다 할 수 있었던 그 시절.

말은 없지만 친밀함은 그대로였고,

그 침묵은 오히려 서로를 더욱 특별하게 묶어두는 끈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는 일부러 서로를 피했다.

서로 없는 듯, 있는 듯

모른 척하며 지내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도, 급식 줄에서도

무심한 얼굴로 각자의 길을 갔다.


하굣길만큼은 늘 함께였다.

하지만 그것조차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명이 조금 빨리 걸으면

다른 한 명은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말이 오가지 않는 거리,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거리였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더 이상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침묵은 점점 어색함으로,

어색함은 차츰 무감각으로 변해갔다.


그 사이

미선의 언니인 미경 언니가 참 부산했다.

“너희 왜 그래?

그만해, 제발 좀! 왜 말을 안 해?”


우리를 앉혀놓고 화도 내고

어르고 달래며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말하지 않는 게

너무 오래된 습관이 되어버린 뒤였다.

서로 한 발짝을 어떻게 내디뎌야 할지

그 방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조금 멀어졌다.

처음에는 너무 익숙했던 얼굴이

어느 날은 스쳐 지나가듯 낯설게 느껴졌고

괜히 눈이 마주치면

서로 동시에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다.


이상한 건,

그 거리감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살짝은 불편했지만

괜찮았다.

서운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알았다.

모든 관계가 다 말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어떤 사이들은

말 한마디 없이도 흐르다가

어느새 조용히 흩어지기도 한다는 걸.


그래도 가끔은—

그 시절의 나처럼

먼저 한 걸음 내딛는 용기를 내볼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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