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세상과 나 사이

그 애가 조퇴하는 날

59화. 그 애가 조퇴하는 날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2학기가 되자 짝이 바뀌었다.
그래도 혜영이와 나는 근처에 앉았다.
말 그대로 팔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
하지만 그 거리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우리는 예전만큼 많이 웃지도, 눈빛을 자주 주고받지도 않았다.
살짝 거리감이 있었고, 나는 그 거리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혜영이는 여전히 수업시간이면 칠판을 향했고,
쉬는 시간이면 조용히 책을 펼치거나 선생님 지시사항을 정리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웃었고, 말이 오가면 여전히 다정했지만
그 시절의 혜영이는 조금 더 조용해지고, 조금 더 고요해졌다.

그 해 겨울이 오기 전,
우연이라는 친구가 우리 반에 전학 왔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눈썹이 진했던 우연이는
등굣길부터 주목을 받았다.

나는 우연이와 짝이 되었다.
반 아이들은 ‘우연이랑 짝이 된 게 부럽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혜영이와 짝이 아닐뿐더러,
혜영이는 우연이가 내 옆에 앉는 걸
어쩐지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 말도 없었고,
여느 때처럼 조용히 수업을 들었지만
그 무표정 사이로 묘한 감정의 기류가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혜영이는 나랑 짝이 되는 걸 좋아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1학년 때도, 2학기엔 짝이 다르지만 근처에 앉게 되었을 때도
혜영이의 눈빛은 조금은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 마음이 나에게도 전달되었기에,
나는 한동안 우연이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우연이는 활발하고 다정한 아이였지만
나는 속을 쉽게 보이는 성격이 아니었고,
혜영이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새로운 친구에게 다가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혜영이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혜영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께 조퇴 신청을 했고
나는 같이 나가겠다고 따라나섰다.

혜영이의 걸음은 느렸다.
종아리를 쓸며 걷는 교복치마 아래로
작게 떨리는 다리가 보였다.

학교 정문을 지나 버스정류장까지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혜영이는 조용히 숨을 참듯 버텼고
나는 옆에서 조용히 걸음을 맞췄다.

“같이 가줄까?”
버스가 도착하자 물었지만
혜영이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너 수업 가.”
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려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날 이후로
혜영이는 한 달에 한 번
꼭 그렇게 배를 움켜쥐고 조퇴하곤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꼭 결석했다.
처음엔 그냥 몸이 안 좋은가 보다 했지만
몇 번 반복되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병원 다녀왔어.”
한 번은 그렇게 말해줬다.
그 말속엔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꺼낸
조금의 쑥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땐 그런 이야기를 편하게 주고받기엔
우리 나이는 너무 어렸고
부끄러움은 너무 컸다.

그래도 조퇴하는 날이 오면
나는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혜영이가 병실 대신
조용한 길 위에서 친구의 온기를 느끼길 바랐다.

2학년이 되고 나서
우리는 점점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혜영이는 여전히 반장이었고
우연이는 금세 반 아이들과 친해졌고
나는 그 사이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혜영이는 친구가 많아도 늘 혼자였고
나는 혼자인 듯해도 늘 친구가 곁에 있었다.

나는 그게 뭐가 다른지를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땐 몰랐지만
혜영이는 은근히 낯을 가리는 아이였다.
멀리서 손을 흔드는 건 잘해도
다가와 손을 잡는 건 익숙하지 않았던 아이.

그 애가 조퇴하는 날,
나는 항상 창밖을 멍하니 보며
‘내가 걷는 이 작은 마음의 거리도
언젠가는 따뜻해지려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거리는
조퇴하던 그날 오후
느리게 걷던 버스 정류장까지의 발자국으로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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