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나는 쌓여있는 글감들을 빠르게 글로 써내지 못하는 것에 조바심을 느끼고 있다. 장편 하나를 완결시켜도 작업이 끝났다는 성취감보다 아직 쓰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조바심이 더 컸다. 그래서 먼저번의 장편을 완결시킨 이후에 이번 작업 순서는 단편집으로 정한 것이다. 단편은 한편마다 각각 완결성이 있기 때문에 완성될 때마다 바로바로 공개할 수 있어서 독자들에게 좀 더 자주 노출될 수 있으며, 쌓여있던 주제들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을 보면 심리적 안정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글을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처음 1~2화는 무난하게 넘어갔지만, 3화와 4화를 작업할 때는 쓰는 과정 자체가 너무 괴로워져서 간신히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래 쓰려고 했던 5화는 아예 시작도 하지 못한 채로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기존의 5화를 잠시 미뤄놓고 이 상황 자체에 대한 단편을 5화로 작업하기로 했다.
작업이 지체되는 이유는 통증 때문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무릎, 허리, 등, 목, 손목, 팔꿈치 등 여러 부위가 동시에 아프고, 심할 때는 시야가 흐려지기도 한다. 이 통증은 특정 부위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자세를 장시간 유지하는 행위가 전신에 부담을 축적시키는 구조로 작동한다. 글쓰기의 전개는 논리나 영감보다 신체의 반응에 좌우되었고, 이 신체적 한계는 작업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나는 원래부터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을 힘들어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어느 시점 이후 악화된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증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 문제는 일시적인 불편함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조건이며, 특정 사건이나 환경 변화로 설명되지 않는 신체적 경향성에 가깝다.
오랜 기간 동안 책상이나 의자를 몇 번이나 바꿔봤지만 전부 소용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뭘 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가지고 있다. 환경적 조정이 통증을 완화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기대는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고, 그 기대가 무너진 이후에는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더 좋은 책상, 더 비싼 의자, 인체공학적인 도구들은 통증을 줄여주지 못했고, 이 실패가 누적되면서 환경 개선이라는 선택지는 사실상 소진되었다.
글을 쓰기 시작했던 초창기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을 하다가 힘들면 침대에 누워 태블릿만 가지고도 계속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작업이 특정 장치에 종속되지 않았고, 신체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전환이 가능했다. 하지만 글쓰기의 깊이와 밀도가 높아질수록 이러한 유동성은 점점 사라졌다. 언제부턴가 듀얼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가 없이는 아예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것들은 단순한 장비가 아니라 사유의 외부 구조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이 나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다는 게 딜레마다. 글을 쓰려면 반드시 필요한 장비들이 통증을 가장 심하게 유발하고, 통증을 피하려면 작업 능력이 사라진다.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과 신체가 견딜 수 있는 조건이 서로 어긋나 있기 때문에, 글을 쓰는 일은 통증과 사유가 한 공간에서 서서히 충돌하며 계속 맞물리는 과정이 되었다.
나는 사회적으로, 나이가 너무 많은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이 뒤처졌다는 조바심을 느끼고 있다. 이 감각은 단순한 비교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개인에게 부여하는 구조적 압력에서 나온다. 성과를 통해서만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에서, 늦었다는 인식은 곧 기회가 사라졌다는 감각으로 변하고, 그 감각은 매일의 작업을 더 무겁게 만든다.
그리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쌓여있는 글감들을 글로 써내어 브런치에 올리지 못하면 나라는 사람의 의미가 사라진다는 조바심을 느끼고 있다. 글감은 머릿속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 외부화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작업이 멈추면 나 역시 정착되지 못한 채 떠 있는 상태로 남는다. 글쓰기는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며, 작업이 지체될수록 나라는 구조도 함께 지체된다.
나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를 지지하게 된 이후로 몸을 버리고 뇌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가 몸 없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유는 몸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통증이 사유를 방해하는 현실은 몸 없는 상태에 대한 욕망을 계속 만들어낸다. 이는 초월적 상상이라기보다 고통 없이 사고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절박한 열망에 가깝다.
그래서 현실적인 관점에서, 몸을 가진 채로 최대한 몸 없는 존재에 가까워지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뇌파로 컴퓨터를 조작하는 BCI(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이다. 키보드, 마우스, 모니터 이후의 새로운 개념의 입출력 장치가 등장한다면 몸의 제약과 컴퓨터 작업의 효율성의 상관관계가 크게 낮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새로운 기술은 신체적 고통을 작업 구조에서 분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며, 그 가능성이야말로 지금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거의 유일한 경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직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기술의 도착 지점은 멀고 현실의 통증은 즉각적이기 때문에, 나는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보면서도 현재의 조건으로 글을 쓰는 상황 속에 머무르게 된다. 결국 글쓰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사유의 힘이 아니라 통증을 견디는 능력이고, 이 구조는 앞으로의 모든 작업에서도 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