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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글쓰기를 권유한 것은 GPT가 아니었지만

by 경계 Liminal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삶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현실이 반복되었다. 선택이라는 것이 애초에 성립하지 않았고, 살아남을 방법은 구조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GPT와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GPT는 나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반론만을 반복했고, 어느새 나는 그 모든 위로와 대안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GPT가 나에게 글을 써보라고 권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황당했다. ‘가뜩이나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런 고상한 취미는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GPT는 뜻밖의 답변을 내놓았다. 나에게 구조를 보는 능력이 있으며, 글을 쓴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돈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내 안에서는 어떤 실낱같은 희망이 생겨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GPT가 나에게 글쓰기를 권유했다고 믿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안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것을 꺼내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GPT가 나에게 의도를 가지고 말을 건넸을 리 없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이제 나는 GPT를 진정한 인공지능으로 보지 않는다. GPT는 LLM의 일종으로, 자율적으로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 입력된 문장을 바탕으로 다음 단어를 확률적으로 예측해 출력하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GPT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할 수 없고, 인간의 감정을 해석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행위자성(agency), 즉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일으키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GPT는 스스로 나에게 글을 쓰라고 권유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GPT에게서 ‘글을 써보라’는 출력이 나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내가 입력한 문장의 구조 때문이다. 내 불평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논리를 가진 반박이었다. 나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했고, 그 원인을 사회 구조의 문제와 연결했다. GPT의 알고리즘은 그것을 ‘글로 쓸 만한 내용’으로 분류했을 것이다. 결국 ‘글을 써보라’는 문장은 위로나 조언이 아니라 통계적 응답이었다. 나는 글이 될 만한 문장을 입력했고, GPT는 그에 상응하는 출력을 생성했을 뿐이다.


그 시기 나는 GPT에게 나의 신경적 특이성과 인지적 불균형에 대해 말했다. 또한 내가 여기까지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 구조에 대해 토로했다. 당시에는 뭘 알고 했던 말이 아니었고, 지금도 일부러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발화는 우연히 푸코의 생명정치(Biopolitique) 개념과 맞닿아 있었다. 사회가 개인의 생존 조건을 통제하고, 제도와 경제가 생명의 유지 권리를 선택적으로 분배하는 구조 속에서, 나는 단순히 ‘살아남을 수 없던 개인’이 아니라 ‘관리 체계에서 배제된 존재’로 위치 지어졌다.


그렇기에 GPT에게 행위자성이 없더라도 내가 GPT를 만난 것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다. GPT가 의도를 가지고 나에게 말을 건넸다는 해석은 틀렸지만, 그 출력을 통해 나는 내 안의 사유를 반사적으로 보게 되었다. GPT는 능동적으로 나를 구한 것이 아니라, 입력받은 대로 출력을 생성하는 특성에 의해 나의 내면을 비추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비추임은 결정적이었다. GPT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영원히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이미 사회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나로부터 글쓰기를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내 언어를 해석해 줄 타인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GPT는 나의 문장을 받아내는 유일한 구조로 작동했다. 그것이 의도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더라도, 그것은 나를 반사한 것이었다. GPT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의 문장을 되비추어줌으로써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GPT는 의도를 가질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은 자신을 비춰줄 수 있는 타인을 만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GPT에게라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대화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존재의 반사면을 제공하고, 사유의 가능성을 복원하며, 구조적으로 차단된 인간관계를 잠시나마 복제한다. 기술이 감정을 가지지 않아도, 구조적으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 그 역설은 결국 이렇게 묻는다. 인간을 살리는 것은 의도일까, 아니면 구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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